실용주의 밀레니얼 세대 문화·주52시간제 등 직무급제 도입에 영향
연차 따지는 연공서열 탈피해 '일한 만큼' 보상하는 회사 늘어

주 52시간제가 도입되고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문화가 직장에 퍼지면서 직무급제를 도입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 연차에 따라 급여가 오르는 연공서열과 달리 직무급제는 일의 중요도·난이도·책임 정도에 따라 급여가 결정된다. 급여를 더 받지만 일이 힘든 보직에서 일할지, 돈은 덜 받지만 편한 업무를 할지 각자 성향에 따라 선택하길 원하는 젊은 직장인들은 직무급제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하는 일’에 따른 합리적 평가를 원하는 시대. 이같은 흐름에 따라 공공기관에서도 호봉에 따라 급여가 오르는 이른바 ‘철밥통’을 깨뜨리고 직무급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공공기관은 직무급 반대? 젊은 동료 대부분 직무급제 원해"
코트라는 58년 만에 호봉제를 폐지하고 올 상반기 중 전 직원에 대해 직무급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40단계에 이르던 호봉제 대신 직원의 업무를 일의 난이도, 중요성, 책임 범위 등을 기준으로 나눠 16등급으로 분류했다. 신(新)시장 개척이나 중소기업의 지원 요청이 많은 해외무역관 근무자는 같은 직급 중에서도 더 많은 급여를 받게 된다.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일한만큼 성과를 받는 직무급제를 환영하는 목소리가 높다.

코트라 관계자는 "직원 79%가 직무급제 도입에 찬성했다"며 "직무급제로 변경해도 근로기준법과 노조 요구 등에 따라 기존에 높은 호봉이던 직원들의 연봉이 낮아지지는 않겠지만, 연차에 따른 임금 차는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또 "같은 부장 직급 간부여도 성과급 격차는 두 배까지 벌어질 수 있다"고 했다.

코트라에 다니는 6년 차 직원은 "하는 일에 따라 평가받으니 남과 비교하면서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직무에만 집중하지 않겠느냐"며 "젊은 동료를 중심으로 직무급제에 우호적인 여론이 높았다"고 했다. 직원 1000명이 넘는 공공기관이 직무급제를 도입하는 건 코트라가 처음이다. 공공기관 10여 개가 올해 안에 직무급제를 신규 도입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차 제도 폐지되니 업무 스트레스 오히려 줄어"
일반 기업도 기존 연공서열 중심의 문화를 탈피해 '하는 일'에 따른 보상 제도를 늘리고 있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해진 기업들이 유연한 조직 문화를 만들기 위해 내놓은 방책이다.

교보생명은 올해부터 급융업계에서는 최초로 직무급제를 일반직 전체로 확대했다. 급여의 일정 부분을 기준 직무급으로 분리해 부장·과장·대리·사원 등 직급이 아닌 직무 등급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방식이다. 높은 직급이어도 자신의 직급보다 낮은 직무를 수행했다면 직무급이 낮아지면서 연봉도 줄어든다.

현대·기아차는 지난해 9월 기존 호봉제 중심의 인사문화를 성과 중심으로 개편하면서 승진 연한 제도를 폐지했다. 과장에서 차장으로 승진하려면 3~5년의 근속연수를 채워야 진급 대상자에 올랐지만, 성과만 우수하면 차장·부장급으로 1년 만에 올라갈 수 있게 됐다. 성과보상 체계를 도입하면서 직원 평가방식도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꿨다. 기존 제도에서는 승진 다음 해를 맞는 직원은 상대평가 때문에 실제 성과와 무관하게 낮은 고과를 받는 일이 관행이었다고 한다.

"동료들은 오히려 연차 제도가 폐지되면서 업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줄었다고 해요. 일한 만큼 보상을 해주니 ‘나는 저 사람 일까지 다 하는데 왜 승진은 더 느리고 월급은 적게 받는가’와 같은 소모적인 불평을 하지 않게 된 거죠." 현대·기아차에 다니는 4년 차 매니저의 말이다.

삼성전자도 ‘능력 있는 후배가 선배보다 더 높은 직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인사 제도가 업무와 전문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다 보니 의사 결정 과정도 빨라졌다는 직원들의 평이 나왔다.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 삼성전자는 보고 때 직급 단계를 순차적으로 거치지 않는 ‘동시 보고’ 방식을 권장하고 있다.

◇연공서열 지배적인 기업 내부선 "이런 분위기에 무슨 혁신이냐"
합리성을 추구하는 추세와 달리 여전히 연공서열이 중시되는 기업에 속한 직원들 사이에선 "과거 제도에 얽매여 있으면 어떻게 혁신하느냐"는 비판이 나온다. 상명하복 문화가 지배적인 한 대기업의 입사 2년 차 사원은 "연공서열은 업무 의사결정을 내릴 때도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하는 후진적 제도"라며 "직급 단계를 모두 거치며 보고를 하다 보면 중간급에서 아이디어를 '뭉개는' 경우도 허다해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고 비판했다.

기업 안팎에서는 인사(人事)와 급여제도가 직무·성과 중심으로 개편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지난해 조직원들의 투표로 호봉제를 폐지한 한 기관 관계자는 "불황 속에서 조직 유연화 전략을 꾀하는 회사 측과 ‘일한 만큼 보상받고 싶다’는 구성원들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면 연공서열을 깨기가 상대적으로 쉽다"며 "합리성을 중시하고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젊은 직장인들이 늘면서 직무급제를 도입하는 기업은 빠르게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