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안병현

'ㅋ[키읔]'은 변방의 자음이었다. 컴퓨터 자판에서 왼손 새끼손가락과 친하다. 그만큼 쓸모가 적었다는 뜻이다.

'ㅋ'은 1990년대 말 PC통신과 게임 채팅창에서 다시 태어났다. '리니지' '바람의 나라'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을 즐기던 사람들이 마우스 조작하기 바쁜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빠르게 'ㅋㅋ'를 타자(打字)하면서부터다. 초성(初聲)만으로 웃음소리를 표현했다.

2000년 무렵 'ㅋㅋ'는 게임 밖 현실로 나왔다. 의사소통의 고속도로를 타고 영토를 넓혀 나갔다.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와 카카오톡, 소셜미디어 등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이 자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년도 버티기 어렵다는 유행어 시장에서 20년 넘게 왕성하게 세력을 확장한 것이다. 이제 중장년도 'ㅋㅋ' 'ㅋㅋㅋ'를 주고받는다. 'ㅋ' 없이 지나는 하루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ㅎㅎㅎ' 'ㅋㅋㅋㅋㅋ' 'ㅋㅎ'는 모두 초성체 시조(始祖) 'ㅋ'님이 낳아 기른 자손들이다.

ㅋㅋ 20년, 변방에서 중심으로

누가 처음 'ㅋㅋ'를 창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PC 게임을 하면서 채팅창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디시인사이드 김유식 대표는 "1990년대 말에 극소수가 'ㅋㅋ'를 쓰긴 했지만 대중화된 시기는 2000년 들어서다. 처음에는 '크크'로 웃어야 하는지, '카카' '키키'로 웃어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했다"며 "빠르게 자음만 두 번 치면 되니까 속도와 편의성 때문에 유행한 것"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지금은 하루에 수십 번씩 쓸 텐데 여러 형태 중 'ㅋㅋ'를 애용한다"고 했다.

게임하다가 급박해지면 자판을 하나라도 덜 치는 '언어의 경제성'이 중요하다. 게임 기획자 이종주씨는 "재미있는 상황에서 치는 'ㅋㅋ'도 그렇고 공격 신호인 'ㅊㅊ(쳐라 쳐라)', 후퇴 신호인 'ㅌㅌ(튀어 튀어)'도 본적지는 게임 채팅창"이라며 "외국인도 어느 시점부터는 'ㅋㅋㅋ'와 발음이 비슷한 'kkk'를 알아듣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제 'ㅋ'와 'ㅋㅋ' 'ㅋㅋㅋ'와 'ㅋㅋㅋㅋㅋ~(5개 이상)'를 구분하고 있다. 'ㅋ'는 무심한 동의, 'ㅋㅋ'는 기계적인 추임새, 'ㅋㅋㅋ'는 중립적 웃음(딱 그만큼 웃기다), 'ㅋㅋㅋㅋㅋ~'는 박장대소를 뜻한다. 'ㅋㅎ'는 약간 놀랍거나 의외일 때 등장한다. 서울문화재단 한정희 과장은 "문장을 그냥 마무리하기 좀 어색할 때 'ㅋ'를 붙이고 '크크크'라고 말하고 싶을 때 'ㅋㅋㅋ'를 쓴다"며 "약간 격식을 차리거나 어른에게 할 때는 'ㅋ' 대신 'ㅎ'을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돌발 퀴즈. 소개팅하고 온 여자한테 "그 남자 어때?"라고 누가 물었다. ①"키도 커" ②"키는 작아" ③"키는 커" ④"키도 작아" 가운데 'ㅋㅋㅋ'를 붙이기 적당한 대답은 무엇일까? 정답은 마지막에 공개한다.

20~50대 4025명 설문조사

'아무튼, 주말'은 지난 6일 SM C&C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의뢰해 'ㅋ 사용법'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다. 20~50대 남녀 4025명이 응답했다.

일상에서 ㅋ나 ㅋㅋ, ㅋㅋㅋ 등을 사용하는지부터 물었다. 1668명(41%)이 '자주 쓴다'고 답했다. '가끔 쓴다'(35%), '거의 쓰지 않는다'(15%), '전혀 쓰지 않는다'(9%) 순이었다. '자주 쓴다'는 응답은 20대 여성에서 69%로 극점을 찍었다. 50대 남성(17%)과 견주면 격차가 컸다. 모든 세대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ㅋ를 이용해 감정을 더 풍부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초성체를 사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문항은 복수응답이 가능했다. '친근감을 주려고'가 45%로 으뜸이었다. 이어 '실제로 웃긴 말이라서'가 38%, '없으면 어색해서'가 28%, '언어의 경제성을 위해서'가 17%를 차지했다. 세대별로 차이가 두드러졌다. '친근감을 주려고'는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몰표를 받았다. 반면 '실제로 웃긴 말이라서'와 '없으면 어색해서'는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지지율이 높았다. 젊은 세대는 실제로 웃긴 말이라서 자연스럽게 ㅋ를 사용한다면, 중장년은 친근감을 주려는 의도가 더 앞선다는 얘기다.

ㅋ의 개수에 따라 일정한 의미 차이가 있다. 설문조사 응답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형태는 'ㅋㅋ'(50%)였다. 'ㅋㅋㅋ'의 지분은 32%, 'ㅋㅋㅋㅋ'는 12%였다. 하지만 20대 여성은 취향이 완전히 달랐다. 'ㅋㅋㅋㅋ'(40%)와 'ㅋㅋㅋ'(37%)를 'ㅋㅋ'(21%)보다 더 자주 붙인다고 했다. 젊은 세대는 의사소통에 ㅋ를 사용하지 않으면 어색해하고 ㅋ의 개수를 더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 관용어처럼 하나의 언어 습관이 된 셈이다.

직장 상사에게는 ㅋㅋ와 ㅎㅎ 중 무엇을 쓸까. 'ㅋㅋ를 선호한다'가 34%, 'ㅎㅎ를 선호한다'가 25%, '둘 다 쓰지 않는다'가 23%, '둘 다 쓴다'가 18%로 조사됐다. 'ㅎㅎ를 선호한다'는 응답은 20대 여성(32%)에서, 'ㅋㅋ를 선호한다'는 응답은 30대 남성(46%)에서 가장 높았다. 직장 상사에게 ㅋㅋ 대신 ㅎㅎ를 쓰는 까닭을 묻자 "공손해 보이기 위해서"(38%), "ㅎㅎ가 더 보편적이라서"(31%)가 1~2위로 꼽혔다.

감정 표현을 요구하는 사회

스테디셀러 '회사의 언어'를 쓴 김남인씨는 "ㅋㅋㅋ는 캐주얼하고 개인적이라면 ㅎㅎㅎ는 보편적이라서, 회사에서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은 ㅎㅎㅎ를 선호한다"며 "가까운 경우가 아니라면 상사에게 ㅋㅋ를 쓰지는 않는 편"이라고 말했다. 또 임원의 세계에서는 ㅋ, ㅇ, ㅇㅋ 등으로 짧아진다고 했다.

번성하는 말을 보면 그 사회를 가늠할 수 있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를 쓴 문장 수리공 김정선씨는 "한글은 소리문자이고 조금 다른 뉘앙스의 웃음소리를 표현한 것"이라며 "언어는 언중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변하는 것이고, 20년이 지났다면 'ㅋㅋㅋ'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 설문조사 응답자들에게 초성체 ㅋ 사용 여부가 의사소통에 차이를 만드는지 묻자 '매우 그렇다'가 10%, '그런 편이다'가 58%로 나타났다. 10명 중 7명은 ㅋ의 쓸모를 공인한 셈이다. 김한샘 연세대 언어정보연구원 교수는 "감정 표현을 쓸 상황이 늘어났다는 사회적 맥락을 엿볼 수 있다"며 "초성체 ㅋ는 구어에서 억양, 문어에서 문장부호, 대면 소통에서 표정이 각각 수행하는 감정 표현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퀴즈 정답을 공개한다. ③번이다. 이미란 롯데문화재단 홍보책임은 "ㅋㅋㅋ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전제한다"며 "'키는 크지만 다른 건 별로야'라는 의미를 부여하려면 '키는 커ㅋㅋㅋ'라고 써야 어울린다"고 했다. 이번 주 유명해진 서울 강남 유흥업소는 하필이면 'ㅋㅋ&트렌드'다. ㅋ의 바다는 넓고도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