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글로벌 기업들이 머뭇거릴 때 과감하게 투자해 기회를 선점하고 국가 경제에도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서울 이태원동 승지원에서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회장은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황이지만,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삼성그룹 최고경영진은 이 회의에서 2020년까지 23조3000억원을 투자해 태양전지·자동차용 전지·LED(발광다이오드)·바이오 제약·의료기기 등 5대 신사업에서 매출 50조원, 고용 4만5000명을 창출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5대 신수종(新樹種) 사업 성적표를 살펴보니, 3개 분야에서는 사실상 실패했거나 낙제를 겨우 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2개 분야에서는 10년 전 약속을 이행했거나 당초 목표를 뛰어넘는 실적을 거뒀다. 과연 이 회장은 어느 분야에서 A학점을 받았고, 어느 분야에서 F학점을 받았을까? 또 이 회장과 그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공통으로 꼽은 신수종사업도 있다. 그들 부자의 원픽은 무엇일까.

삼성전자 이건희(왼쪽에서 둘째) 회장과 이재용(왼쪽에서 넷째) 부회장 등이 2010년 5월 17일 경기도 화성사업장에서 열린 ‘메모리반도체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해 삽을 뜨고 있다. 이 행사 일주일 전, 이 회장은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고 5대 신성장 사업에 10년 동안 23조원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의 아픈 손가락

태양전지는 5대 신수종 사업 중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힌다. 당초 삼성은 폴리실리콘(삼성정밀화학), 잉곳·웨이퍼(삼성코닝정밀소재), 태양전지·모듈(삼성SDI), 태양광 발전소(삼성물산) 등 태양광 사업을 위한 그룹 수직 계열화를 완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삼성SDI는 2012년 결정형 태양전지 생산을 중단했고, 2014년에는 아예 사업에서 철수했다.
LED 사업은 천덕꾸러기 신세다. 삼성전자는 2014년 LED 조명 관련 판매, 마케팅 등 해외 사업을 중단했다. 이듬해 삼성전자 LED 사업부는 사업팀으로 축소됐고, 지난해에는 LED 사업팀 일부 인력이 메모리사업부로 전환 배치돼 사업 철수설이 나오기도 했다. 의료기기 사업도 지지부진하다. 삼성은 지멘스·필립스 등 글로벌 기업이 주도하는 대표적인 '선진국 독점 사업'인 의료기기 사업에 야심 차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삼성메디슨은 지난해 매출 3255억원, 영업이익 25억원에 불과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선방하고 있는 자동차용 전지, 바이오 제약

반면, 자동차용 전지 사업은 전기차 성장세에 힘입어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SDI는 지난해 창사 이래 처음으로 연 매출 10조원을 달성했고, 자동차와 휴대폰 전지를 합친 부문에서 매출 7조7000억원을 올렸다. 당초 목표인 매출 10조원에는 다소 미흡한 수준이지만, 고용(9107명)은 이미 목표치(7600명)를 앞질렀다. 삼성SDI는 지난 1분기 판매된 글로벌 전기차 탑재 배터리 사용량에서 전년 동기보다 34% 증가해 전 세계 4위를 차지했다. 삼성SDI 배터리를 사용하는 폴크스바겐 e-골프, 파사트 GTE, BMW 330e 등의 판매 호조에 힘입어 사용량이 늘어난 것이다.
가장 성적이 좋은 분야는 바이오 제약이다. 의약품 위탁 생산(CMO) 업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매출은 7015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1%, 영업이익도 917억원으로 65% 늘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등을 둘러싼 검찰 수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주식시장에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 이어 코스피 시가총액 3위 기업으로 급성장할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 바이오시밀러(복제약) 개발 기업 삼성바이오에피스 역시 지난해 매출 7658억원, 영업이익 1228억원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특히 바이오 분야는 이건희 회장의 5대 신수종 사업이자, 그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4대 미래 성장 사업이기도 하다. 2018년8월 이 부회장은 2020년까지 180조원을 투자하고 4만명을 채용하겠다고 밝혔다. 이때 바이오 사업을 AI(인공지능)·5G(5세대 이동통신)·전장(電裝) 부품과 함께 신성장 사업으로 꼽아, 이 분야들에만 25조원을 투자해 미래 산업 경쟁력을 높이겠다고 했다. 바이오 사업은 오랜 기간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지만 고령화, 만성·난치 질환 증가 등 사회적 문제 해결에도 기여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삼성그룹이 많은 공을 쏟고 있다. 재계에서는 바이오 분야를 '제2의 반도체'로 키우겠다는 삼성 전략이 성공할지 주목하고 있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학과 교수는 "신성장 사업의 성패(成敗)는 시장에 대한 수요예측과 경쟁자와의 경쟁력 비교우위에서 결정되는데 태양전지·LED·의료기기 사업은 불확실한 시장 수요예측과 중국 등 해외 업체와의 경쟁력에서 뒤진 것이 문제였다"며 "반면, 바이오 복제약 분야는 반도체 공정에서의 무균 프로세스 등과 같은 뛰어난 품질관리와 막대한 자금력 등 삼성 특유의 장점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에 좋은 실적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