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근씨는 “내가 더는 예전처럼 직접 뛰면서 실종자를 찾아 나설 순 없지만, 노하우와 경험으로 실종 상황을 진단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돕고 싶다”고 말했다.

1970년대 일이다. 대기업 S사가 ‘H씨를 찾아달라’며 현상금 500만원을 내건 수배 광고를 신문에 냈다. H씨는 서울 시내 대리점에서 텔레비전 등 S사 전자제품을 팔다가, 대금을 S사에 납부하지 않은 채 잠적해버린 인물이었다. 당시 30대 청년이던 서영근씨는 광고를 본 후, H씨를 찾기 위해 그의 통화 내용을 입수했다. 서씨는 “그때는 이런저런 인맥을 통하면 전화국에 가서 개인의 통화 내역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이를 단서로 수소문한 끝에 H씨가 경북 울진에 있는 처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씨는 울진으로 가서 H씨를 목격했고, 함께 울진으로 내려간 S사의 채권관리과 직원 10여 명에게 알렸다.

40여 년 동안 사람 찾는 게 직업인 사람이 있다. 서영근(77)씨. 그는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을 찾아달라는 대기업 수배 광고를 보고 찾으러 나섰고, 사라진 어머니를 찾아달라는 청을 받고 결국 무연고자 묘지로 그 가족을 인도한 적도 있다. 40여 년간 1000여 명을 쫓았고, 그중 200여 명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왜 사람 찾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을까. 어떻게 사람들을 찾았을까. 팔순을 바라보는 그에게서 노하우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바람난 남편이나 아내를 찾아달라는 의뢰에는 단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미로 시작한 사람 찾기

―어떤 사람을 찾는 건가.

"과거 흥신소가 맡았던 업무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신용(信用) 조사고, 다른 하나는 소행(所行) 조사다. 신용 조사는 개인의 은행 거래 내역이나 재산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고, 소행 조사는 특정인의 뒷조사를 하는 거다. 나머지 하나는 도망가거나 사라진 사람을 찾아내는 거다. 행방(行方) 조사라 부르는데, 나는 이것만 했다. 신용 조사는 머리도 써야 하고 내 능력 밖의 일이었고, 뒷조사는 지저분하다는 생각에 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나 찾으러 나선 것은 아니다. 반드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 사람만 찾았다. 불륜처럼 지저분한 일은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안 했다."

―사람 찾는 일이 어렵다. 왜 시작했나.

"사실 군대에 있을 때 이런저런 문제로 몇 차례 탈영한 적이 있다. 그때 숨었다가 자수하면서, 이런저런 노하우가 쌓였다. 또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 찾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셜록 홈스나 루팡 같은 탐정 소설도 많이 읽었다. 1970년대 초반 제대할 무렵, 흥신소에 가서 일거리를 잡았다. 당시에는 명동에 사람을 잡아달라고 써 붙여 놓은 게 정말 많았다. 삼성이나 롯데 등 대기업도 그랬다. 전화를 해서 얘기를 들어봤다. 그래서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면 찾기에 나섰다."

―경찰과 부딪칠 일도 있었을 텐데.

"1970년대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기 사흘 전 일이다. 당시 파출소(현재의 지구대)에는 '급사'라고 해서 청소와 자잘한 심부름을 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한 파출소 경찰관이 권총을 올려놓고 세수했는데, 급사가 그 사이 권총을 갖고 잠적했다. 급사의 부모가 아들을 찾아달라고 신문에 광고를 냈다. 나는 그 아들이 권총을 갖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그 부모를 만났다. 그러자 곧바로 경찰이 와서 나를 연행해 갔다. 거기에는 서울 시내 경찰서 수사과장들이 모여 있었다. 나보고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하더라. 곧 내가 아무런 혐의가 없는 것을 알고 나서 오히려 나한테 그 사람 찾기를 도와달라고 했다."

―딱 보면 찾을 수 있겠다는 감(感)이 오나.

"감이라는 건 전혀 없다. 열심히 뛰는 거다. 찾는 사람 말을 잘 들어보고 끈질기게 수소문해야 한다. 당연히 경찰이 나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그런데 경찰이 못 찾는 사람을 내가 찾는 것은 집념 때문이다. 경찰을 했던 사람 가운데 나처럼 사람 찾는 일을 해보려고 했던 사람이 몇 있었는데, 나만큼 오래 하지는 못하더라. 내 생각에는 나만큼 집념이 없었던 거 같다."

―변심한 애인도 아니고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찾는다. 집념은 어디에서 오나

"기쁨에서 온다. 내가 찾아줘서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가장 기쁘다. 내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고, 돈도 없지만, 그 기쁨 때문에 한다."

―후회하거나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 없다. 애타게 찾는 가족의 마음이 내 마음이다. 한번은 실종된 할머니를 찾는다는 가족의 전단을 보고 찾으러 나선 적이 있다. 알고 보니 그 할머니가 서울에 있는 집을 나가서 다른 곳에서 사망했고, 무연고 묘소에 묻혔더라. 묘지를 찾아줬을 때 그 아들이 울더라. 가슴이 뭉클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돈 욕심을 내면 안 된다. 극단적으로 내가 특정인을 찾았는데 그 사람이 역으로 나보고 '당신에게 나를 찾아달라고 의뢰한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나. 사람 찾는 게 꼭 돈을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게 확실할 때 찾는다. 정의감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 찾으면 얼마나 벌었나.

"1980년대 대기업은 한 사람 잡으면 보통 500만원을 줬다. 당시에는 상당히 큰돈이었다. 물론 착수금은 없다. 찾으면 얼마를 주겠다고 미리 각서를 쓰고 하는 방식이다. 과거 북한과 관련된 가족을 찾아줬을 때 5000만원을 사례비로 받은 적도 있다."

실종자 가운데 생존자 꽤 있을 것

2000년대 초반 서씨는 한 실종자 가족이 만든 실종자 가족 모임에 들어가서 실종자 찾기에 나섰다. 그러다 그 모임이 흐지부지되면서, 스스로 전국 가출인(실종자) 찾기 운동본부를 만들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공백이 있었다가 다시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은 혼자다.

―왜 단체를 만들었나.

"우리 주변에는 미아(迷兒)에 대한 관심은 많다. 그런데 범죄를 당하거나 가출해 찾지 못하는 성인이 더 많다. 사망한 사람도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도 많다. 어떤 사람은 출입국관리소 기록에도 없고, 은행이나 각종 보험 이용 내역도 없는데, 일본에 멀쩡히 살아 있는 경우를 봤다. 밀선(密船)을 통해 몰래 출국하고 입국할 수도 있다. 지금 언론에 많이 알려진 실종 사건 가운데도 이런 식으로 살아 있다고 의심할 만한 경우도 여럿 있다고 본다. 실종자로 인해 가족이나 지인들이 받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야 한다."

―사람 찾다 보면 무서울 때가 있을 텐데.

"내가 직접 가서 잡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을 찾아내는 거다. 예를 들어 삼성이나 롯데 같은 대기업이 누구를 찾아달라고 의뢰했을 때면 늘 대기업 직원들과 함께 갔다. 그들에게 '저기 사람 있다'는 식으로 알려주는 거다. 그게 무서울 수가 없다."

―사람 찾는 게 옛날이 쉬웠나, 지금이 쉬운가.

"옛날이 쉬웠다. 내가 한창 활동하던 시절에는 지금보다 개인 정보 보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70년대에는 전화국에 가면 누가 몇 국에 몇 번으로 전화했다는 게 기록돼 있었다. 전화국에 가서 '내가 가족이니 좀 알려달라'고 하면 보여줄 정도로 허술했다. 지금은 휴대전화에 인터넷까지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쉽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개인 정보 보호를 규정한 법 때문에 사실상 못 한다."

―앞으로 목표는.

“나는 나이도 많고, 인터넷도 제대로 쓸 줄 모른다. 더는 직접 사람을 찾으러 다닐 수는 없다. 지금은 경찰청 산하 실종자가족지원센터(02-3150-1582)에서 실종자에 대한 신고를 받고 있다. 경찰에서 실종자를 잘 찾을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