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차이 구글 CEO(왼쪽), 쿡 애플 CEO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혁신의 심장' 실리콘밸리가 연일 충돌하고 있다. 11월 대선을 앞두고 정반대 성향을 가진 두 권력이 팽팽히 맞서는 모양새다.

지난 22일(현지 시각) 트럼프 대통령이 외국인의 '취업 비자' 신규 발급을 연말까지 중단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에 대해 실리콘밸리 주요 기업이 모두 나서 반발했다. 팀 쿡 애플 CEO는 23일 트위터에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다양성에서 힘을, 아메리칸 드림이란 약속에서 희망을 찾았다"며 "이번 조치에 깊이 실망했다"고 밝혔다.

앞서 인도 출신인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역시 "이민이 오늘날의 구글을 만들었다"며 "계속 이민자 편에서 모두를 위한 기회를 확대할 것"이라고 했다. 아마존은 성명을 통해 "정부 정책이 근시안적"이라고 했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소프트웨어 개발자와 같은 고숙련 외국인 근로자들의 취업 비자 발급을 연말까지 임시 중단하는 것이 핵심이다. 백악관은 코로나로 실직한 미국인들의 일자리가 우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 조치가 인도·중국 출신 등 고학력 이민자를 급속히 빨아들이며 성장해온 실리콘밸리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게 되자 주요 기업인들이 일제히 비판에 나선 것이다.

한 달 전에도 양측은 크게 맞붙었다. 지난달 28일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글에 '팩트체크 경고' 딱지를 붙인 트위터를 겨냥해 소셜미디어의 법적 면책권을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내린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치졸한 정치적 보복'이라며 맞섰다. 그 이전에도 반(反)이민정책, 성소수자 문제, 기후변화 협약 탈퇴 문제 등을 두고 충돌해왔다.

나라를 먹여 살리는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과 트럼프 대통령은 왜 연일 다투는 것일까. 일단 둘은 지향점이 정반대다. 트럼프 행정부 주요 정책은 전통 제조업 부흥, 이민 제한을 통한 일자리 보호다. 반면 실리콘밸리는 혁신 기술로 전통 산업을 빠르게 파괴하고 있다. 우수한 고학력 이민자들이 그 원동력이다. 또 보수적 기독교 기반의 트럼프와 개방성·다양성을 중시하는 실리콘밸리는 성격도 다르다.

코로나 사태도 양측의 갈등을 키운 요소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방역 실패와 경기 침체로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올 초 49%였던 트럼프에 대한 직무 수행 지지도는 현재 39%로 하락했다. 24일 발표된 뉴욕타임스와 시에나대학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오늘 대선이 열린다면 누구에게 투표할 것이냐'는 질문에 트럼프는 36%를 얻어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50%)에게 14%포인트 뒤졌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무기인 행정명령을 발동하며 지지층 결집에 나선 것이다. 어차피 민주당 텃밭인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실리콘밸리는 '때려도 잃을 게 없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해석된다.

반면 실리콘밸리는 코로나 와중에 오히려 주가가 치솟고 영향력도 세졌다. 테크 기업 빅5(애플·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구글·페이스북)의 시가총액은 연초 5조230억달러에서 현재 6조690억달러(약 7310조원)로 21% 성장했다.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비(非)대면으로 이뤄지는 디지털 서비스 등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테크 기업들의 주가가 오른 것이다. 이런 힘을 바탕으로 실리콘밸리는 트럼프에 맞서고 있다. 테크 기업 직원들은 반이민 정책에 기술을 제공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게시글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위를 하거나 출근 거부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주 고객층인 Z세대(1995~2010년 출생)가 점차 투표권을 가질수록 트럼프에게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이용하며 사회 변화에 동참하는 법을 익혀 파괴력이 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