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전 세계 국가 가운데 미국을 상대로 가장 많은 로비 자금을 공식 지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에도 불구하고 한미(韓美) 관계는 물론 문재인 정부가 역점 추진한 미·북 관계도 실패한 것으로 판명돼 우리나라가 ‘헛돈’ 쓰는 호구(虎口·어수룩해 이용하기 좋은 사람)가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작년 4월11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열린 정상회담 자리에 같이 앉은 한국과 미국 대통령

미국의 비영리 정치 자금 추적 시민단체인 ‘책임정치센터(Center for Responsive Politics, 이하 CRP로 약칭)’가 2016년부터 외국 정부와 기업이 미국을 상대로 로비 활동을 벌였다고 미국 법무부에 신고한 금액을 추적한 결과, 한국(1억6551만8893달러)은 일본(1억5698만달러)과 이스라엘(1억1839만달러),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등을 모두 제치고 1위에 올랐다.

◇한국의 대미 로비 자금 공식 신고액 ‘세계 1위’

같은 기간 민간 부문을 제외한 정부 부문만 볼 경우, 한국의 로비 신고금액(9742만달러)은 일본 정부(1억2663만달러)에 이어 2위로 집계됐다. 민간으로 분류된 코트라, 한국관광공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한국개발연구원(KDI) 등도 사실상 우리 정부의 예산 지원을 받는 기관임을 감안하면, 한국 정부의 로비 액수는 일본과 맞먹는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은 '외국인에이전트등록법(FARA)'에 따라 각국 정부와 민간 단체·기업이 로비 용도로 쓴 금액과 내역을 법무부에 제출·신고하도록 의무화해 놓고 있다. CRP는 자체 홈페이지(www.opensecrets.org)에 2017년, 2018년도분의 외국 로비 의뢰자와 수임자, 관련 서류를 공개해 놓고 있다. 기자는 관련 내용을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1일까지 검색하고 확인·분석했다.

◇문재인 정권 출범한 2017년 대미 로비 자금 지출 급증

눈길을 끄는 점은 2017년도 한국 정부의 대미 로비 지출이 2016년(633만달러) 대비 8배 넘게 갑자기 늘었으며, 2016년과 2018년(1790만달러), 2019년(2146만달러) 등 3개년 합계치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다. 2017년은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이겨 취임한 해이다. 그해 1년 동안 한국 정부(5198만달러)와 민간 (1154만달러)을 합쳐 지출했다고 미국 법무부에 신고된 로비 활동 금액만 6350만달러(약762억원)라고 CRP는 밝혔다. CRP 집계에는 외국 정부와 기업 등이 신고하지 않고 비밀리에 쓴 로비 자금은 포함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우리나라가 공식 로비자금으로 미국 워싱턴 DC에서 한해 6000만달러 넘게 쓰고, 최근 4년 로비 지출액이 세계 1위를 차지한 것은 대한민국 외교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2017년에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했다. 따라서 워싱턴 정가 안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이미지 개선과 행정·입법부 실력자와의 막후 접촉,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같은 경제·통상 문제 대응 필요성 등이 우리나라의 대미(對美) 로비를 강하게 자극한 것으로 풀이된다.

CRP 홈페이지에는 주미 한국대사관이 미국 유력 로펌 겸 로비 전문회사인 애킨 검프(Akin Gump)에 2017년 1월부터 12월말까지 매월 2만8000달러를 지급하는 로비 계약을 맺은 문건 등이 공개돼 있다.

미국 비영리 연구소인 CRP 홈페이지에 공개돼 있는 주미한국대사관과 미국 로비 기업과의 계약서

◇ "돈만 많이 쓰고 로비 효과 거의 없어…'헛돈' 썼다" 하지만 이 같은 물량 공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거둔 성과는 매우 미미하다. 2000년대 들어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정무(政務) 공사를 지낸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같은 기간 로비 지출 금액 2위와 3위인 일본과 이스라엘이 미국과 돈독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은 경제통상 분야에서 '특별 혜택'은커녕 최근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 회고록에서 보듯 한미 관계와 미·북 관계 조율에 모두 실패했다"며 "국민 세금을 갖고 '헛돈'을 썼다고 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볼턴 전 보좌관은 최근 발간된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에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대해 “정 실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정신분열적인 생각(schizophrenic idea)을 보여줬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존 볼턴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과 그의 회고록 '그 일이 벌어진 방'

이 전직 고위 외교관은 “유례없이 많은 로비 자금을 문재인 정부가 어떤 용도로 어디에 얼마만큼 썼고, 어떤 효과를 거두었는지 한국 국회와 시민단체가 집중 추적해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로비 전문회사에 돈 주고 맡기는 건 후진적 로비”

CRP 홈페이지에서 공개된 2017년 1월 초부터 12월말까지 ‘한국 정부(Government of South Korea)’ 이름으로 의뢰한 로비 건수는 모두 21회이다. 한국 정부는 이 로비 물량을 복수의 미국 로비 전문 회사(일부 회사는 로펌에서 로비 업무 수행)들에 맡긴 것으로 밝혀졌다.

2017년의 경우 ‘스크라이브 스트래터지(Scribe Strategy)’와 ‘애킨 검프(Akin Gump)’가 한국 정부가 발주한 로비 자금 수주 1,2위를 차지했다. 2018년에는 1위와 2위가 토마스 캐피톨(Thomas capitol)과 케네디 코빙턴(Kennedy Covington)으로 바뀌었는데, 한국 정부가 두 로비 회사에 지출했다고 신고한 금액은 전년 보다 더 늘었다.

윌리엄 로스(William Roth) 미국 연방상원의원(델라웨어주) 사무실에서 1년간 컨그레셔널 펠로우(Congressional Fellow)로 활동해 미국 의회와 로비 실태에 정통한 박재창 한국외대 석좌교수(의회행정학)는 “로비 전문회사에 워싱턴 로비를 돈 주고 맡기는 것은 효과 없는 돈 낭비일 뿐”이라며 “이것은 개발도상국가들이나 사용하는 가장 초보적인 워싱턴 로비 기법”이라고 지적했다.

◇ “문 정부의 對美 로비, 앞으로도 효과 없을 것”

박 교수는 “전·현직 미국 고위 관리나 연방의원 출신, 또는 우리 전문가들을 로비스트로 꾸준히 양성해 평소에 입법·행정부를 관리하고 교민사회와 지방 각주를 공략해 지렛대로 활용하는 등 대미 로비 방식을 선진화해야 우리 목소리를 워싱턴 정가에 제대로 반영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가 대미 로비 효과를 높이고 국제사회에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로비 금액이나 방식 개선 차원을 넘어 외교 정책과 대북 정책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범철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문재인 정부는 다양한 채널의 대미 로비를 통해 대북(對北) 제재 완화 등을 요구하고 있으나, 미국 입장에서 이는 자국 국가이익에 반(反)하는 일”이라며 “문 정부가 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는한, 앞으로 많은 로비 자금을 써도 미국 조야의 우려와 불협화음만 증폭시킬 뿐 원하는 로비 효과를 거두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