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희 캐리어 끄는 할머니

아침잠 없는 영감은 내가 잠든 사이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온다. 그러곤 혼자 토스트를 구워 먹는다. 자기 배를 채우겠노라고 아침 일찍부터 나를 깨운다면 그것은 늙은 아내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빨래는 세탁기가 해준다. 그 시간에 컴퓨터 앞에 앉아 이웃 블로그로 마실 간다. 냉장고에서 떡을 꺼내 전자레인지로 녹여서 커피 한 잔과 함께 아침을 때운다. 새삼 생각한다. ‘늙으니 참 편하구나.’

나는 1950년생. 아주 오래전 소녀였고, 아가씨이기도 했으며, 아줌마의 시간을 지나 이젠 할머니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 70년을 살았으면 더는 아줌마가 아니다. 그럼에도 내 맘속에는 할머니란 자리로 밀려나가고 싶지 않은 묘한 미련이 있다. 그래서 아직은 "할머니 아니야, 할줌마야!"라며 어깃장을 부려보지만 어딘가 억지스럽다. 그래서 이왕이면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기로 했다.

아들이 결혼하고 새 살림을 차릴 즈음 "나의 의무는 여기까지!" 하며 단호히 캐리어를 끌고 세상 구경을 나섰다. 여행 준비 과정부터 젊은이들과는 다르다. 병원 가서 영양제 한 대 맞고, 가방에는 관절약과 소염제, 찜질팩을 챙긴다.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 어려서 책 속에서 보았던 동화 속 나라를 나이 일흔에 보았다. 'Book'이라는 영단어에 '책'이 아니라 '예약'이란 뜻도 있다는 걸 나이 60에 호텔을 예약하며 깨달았다.

나이 들어 여행한다는 건, 내가 살아온 세상과 시간을 보러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 들어 여행한다는 건, 아직은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날 때가 아니란 걸 확인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 든 몸으로 떠난 여행 이야기, 시니어 세대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이번 책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어버렸지 뭐야’(달)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