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선(先) 동거, 후(後) 결혼식이 유행이라네요.”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한 결혼 준비 카페. 8월 중순으로 예정했던 결혼식을 내년 1월로 미뤘다며, 한 예비신부가 이런 글을 올렸다. 최근 이 카페에는 비슷한 내용의 글이 줄을 잇고 있다. "결혼식이 두 차례 미뤄지면서 벌써 반년째 동거 중" "남편 혼자 들어가 살면 혼수가 중고가 되고, 결혼식 전에 동거하자니 고민이 된다" "결혼 안 미루느냐고 눈치 주더니, 이젠 식 올리기 전에 신혼집 들어간다고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등이다.

지난 19일 정부는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를 시행하면서, 50명 이상 참석하는 실내 결혼식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예비부부들은 결혼식 규모를 크게 줄이거나, 결혼식 자체를 내년 이후로 미루고 있다. 지난 2월 코로나 1차 확산 당시 결혼식을 한 차례 연기했던 예비부부 중에 결혼식을 또 연기한 경우도 있다. 이 과정에서 결혼식 날짜는 미루되, 신혼집 입주는 그대로 하고, 혼인 신고는 하지 않는 예비부부들도 생기고 있다.

동거(同居)의 사전적 정의는 '부부가 아닌 남녀가 부부 관계를 가지면서 한집에서 삶.' 과거에는 결혼식을 올릴 형편이 안 되거나, 이혼 후 재혼 대신 동거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2000년대 이후 '결혼 과정의 한 단계로서의 동거' '결혼의 대안으로서의 동거'가 등장했다. 그러나 동거가 보편화한 서구 사회에 비해, 그간 한국 사회에서 '동거'란 단어는 어딘가 음침한 것, 떳떳하지 못한 것처럼 여겨진 게 사실이다.

코로나가 이 금기 아닌 금기를 깨뜨리는 것일까. '아무튼, 주말'이 2020년 코로나가 만든 동거를 들여다봤다.

편견이 줄었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직장인 박선영(32·가명)씨는 5개월째 동거 중이다. 예정대로라면 지난 3월 결혼식을 올려야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결혼식을 오는 10월로 미루면서 생긴 일이다. 박씨와 예비신랑은 결혼을 준비하면서 각자 살던 집의 전·월세 보증금에 대출을 받아 전세로 신혼집을 구했다. 입주 날짜에 맞춰 신혼살림과 가전도 이미 다 채워 넣은 상태. 각자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 중이었던 두 사람은 신혼집이 아니면 당장 돌아갈 곳이 없어 동거를 시작했다.

박씨는 "부모님께서 식장도 안 간 딸이 동거부터 한다고 썩 좋아하지는 않으셨다"면서도 "오히려 코로나가 준 기회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과거 동거를 어렵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편견'이었다. 동거 로맨스를 다룬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를 보고,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를 읽고 자란 2030세대는 다르다. 결혼 준비 커뮤니티 내에도 "신혼여행 가방 하나로 쌀 수 있어서 좋다" "이번 추석에는 각자 집 가면 되니 걱정 없다" 등 긍정적인 반응이 많다.

통계도 이런 인식을 반영한다. 2018년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만 13세 이상 인구 중 '남녀가 결혼하지 않아도 같이 살 수 있다'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12.9%였다. '약간 동의한다'는 43.5%, '약간 반대'는 26.3%, '전적으로 반대'는 17.3%였다. 찬성과 반대로만 따지자면, 조사 시작 후 처음으로 찬성(56.4%)이 반대보다 많았다. 이 조사는 통계청이 2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것으로, 2018년이 최신 조사. 2010년 조사에서는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함께 살 수 있다'에 찬성하는 비율이 40.5%였다.

특히 2018년 조사에서 20대의 경우 동의가 74.4%(전적으로 동의 22.1%·약간 동의 52.3%), 30대의 경우 73.2%(전적으로 동의 19.2%·약간 동의 54.0%)였다. 주요 결혼 연령대인 2030세대가 전 연령대를 통틀어 동거에 가장 개방적이었다. 반면 예비부부의 부모 세대인 60세 이상 65세 미만의 경우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사람은 4.7%, 약간 동의는 30.1%였다. 약간 반대가 34.4%, 전적으로 반대가 30.8%로 찬성보다 반대가 더 많았다.

혼인신고 안 해야 유리하다?

요즘 예비부부 사이에선 '혼인신고 하지 않는 게 여러모로 유익하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여기엔 '살아보고 결정하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실은 경제적인 이유가 크다. 특히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데다 청약 당첨은 점차 어려워지면서, 내 집 마련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혼인신고를 미루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11월 결혼한 유모(28)씨는 결혼한 지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공공분양 신혼부부 특별공급을 노리기 때문이다. 특별공급의 경우 혼인 기간, 자녀 수 등을 따져 점수를 매긴 뒤 당첨자를 정한다. 혼인 기간은 짧고, 자녀는 많을수록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유씨는 "수도권 인기 지역의 경우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야 당첨이 가능하다"며 "고점을 받기 위해 아이가 생긴 후 혼인신고를 하려고 한다"고 했다.

최근 서울 지역 등에서 주택담보대출이 시세의 40%로 제한되면서, 예비부부들이 고안한 대출 방법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것이다. 남편 이름으로 전세를 끼고 집을 산 다음, 세입자가 나가면 아내가 전세자금대출을 받아 남편과 같이 입주한다. 주택담보대출은 시세의 40%로 제한되지만, 전세대출은 보증금의 80%까지 연 2%대로 빌릴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한 것. 혼인신고를 하면 임대인과 임차인이 부부가 돼, 전세대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작은 결혼식보다는 미루자가 대세

우리의 결혼식 문화도 '코로나 동거'를 확대하는 요소다. 몇 년 전 불필요한 절차를 간소화하고 허례허식을 줄이자는 취지의 작은 결혼식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정착이 힘들다. 예식장 위약금 문제가 아니더라도, 규모를 줄여서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루자는 의견이 많다는 것.

중견기업에 다니는 박영훈(31·가명)씨도 지난 4월 예정했던 결혼식을 오는 10월로 미뤘다. 박씨는 "우리만 생각하면 작은 결혼식을 하고 싶지만, 결혼식은 부모님 잔치이기도 하니 하객 초청을 안 할 수가 없더라"며 "한 공간에만 50명 이상이 모이지 않으면 된다고 해서, 식장 내 여러 공간을 활용해 하객을 모시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육아정책연구소가 2016년 12월 실제 결혼식을 올린 기혼 여성 1173명을 대상으로 작은 결혼식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다. 응답자의 67%는 '가능하면 작은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고 했으나, 그중 실제 작은 결혼식을 했다는 응답은 50.8%에 그쳤다. 작은 결혼식을 못한 가장 큰 원인은 '가족 반대(22.9%)'였으며, '남들 하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아서(19.1%)', '그동안 뿌린 축의금 생각에(16.6%)' 등이 뒤를 이었다.

서울 강동구에 사는 김모(32)씨는 지난 6월 코로나로 인해 40명 내외만 초대하는 '작은 결혼식'을 했지만, "차라리 큰 결혼식을 하는 게 나을 뻔했다"고 말했다.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부터 힘들었다. 김씨가 개혼(開婚)인 데다, 김씨 아버지가 아직 현직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김씨는 "당사자인 남편과 나는 축의금 등에 대해서 그렇게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부모님께서 그동안 다닌 결혼식 얘기를 하셨다"며 "결국 아버지 손님을 모아 '피로연'을 따로 하는 방식으로 합의를 봤다"고 했다.

코로나 시국이니 다들 이해해 줄 거라는 예상도 깨졌다. 막상 '작은 결혼식'을 한다고 하니 '무슨 문제가 있느냐'며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 초대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결혼식 하는 사정을 얘기하는 게 결혼식 준비보다 훨씬 힘들었다"며 "'아직 한국 사회에서 작은 결혼식은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프랑수아 올랑드(왼쪽) 전 프랑스 대통령은 세골렌 루아얄(오른쪽) 전 환경에너지부 장관과 30년 가까이 동거하며 자녀 넷을 낳았다.

혼외 출산율 40.5% 對 1.9%···우리도 동거 늘면 출산 늘까

한국은 혼외 출산율(1.9%·2014년 기준)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낮은 나라다. 혼외 출산은 비혼·동거 등 결혼 제도 밖에서의 출산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 OECD 평균(40.5%)보다 크게 낮으며, 프랑스(56.7%)·스웨덴(54.6%)·네덜란드(48.7%) 등 일부 유럽 국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수치다.

프랑스는 1999년 시민연대협약(PACs) 제도를 도입했다. 개인 간 동거 계약(팍스)만 있으면 조세·육아·교육·사회보장 등에서 법률혼과 동등한 대우를 해준다. 프랑스 신생아의 59.9%(2017년 기준)가 결혼하지 않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다. 스웨덴·네덜란드 등도 비슷한 제도를 시행 중이다.

몇 년 전부터 국내에서도 저출산 타개의 방법으로 다양한 가족을 지원하자는 목소리가 생겨나고 있다. 결혼·혼인 장려를 전제한 상태에서의 저출산 정책 대신, 다양한 가족 형태를 먼저 인정해주자는 것이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도 저출산 해결을 위한 5대 과제 중 하나로 ‘모든 아동·가족 지원’을 내세우고 있다. 혼인 여부 등에 따른 차별 및 불합리한 제도를 발굴해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송효진 연구위원은 “혼인율을 높여 출산을 늘리자는 정책은 이제 소용이 없다”며 “혼인 제도는 원하지 않아도 친밀성이나 돌봄에 대한 욕구가 있는 사람들이 하는 선택이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 송 위원은 “이제 정책 하나로 급작스러운 출산율 반등을 노리는 건 어렵다”면서도 “비혼 가족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이 개선되고, 필요한 법적 제도 등이 뒷받침돼 ‘동거 가족이라도 출산과 양육이 불편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출산율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