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군 출신 허모씨는 작년 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 6·25 당시 마흔이던 아버지와 열네 살 형이 진도경찰서 경찰에 의해 피살됐다고 신고했다. 조사관이 1기 진실화해위 자료를 검토했더니, 두 사람은 이미 인민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1952년 3월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6·25 피살자명부’에도 각각 1950년 9월 7일과 9월 25일 진도군에서 피살된 것으로 올라있었다. 위원회 관계자는 신청인 허씨에게 전화를 걸어 검토 결과를 설명하고 인민군·좌익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으로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설명했다. 허씨도 동의했다. 가해 주체로 우리 군경을 지목했으나 인민군·좌익세력으로 바뀐 경우다.
전남 신안군 출신 박모씨는 6·25 당시인 1950년 10월 증조부모와 조부모, 큰아버지 등 일족 7명이 군경에 의해 집단희생됐다고 신청했다. 조사관이 사건 경위를 묻자, “경찰에 의해 죽었다는 것 외엔 잘 모른다”고 답했다. 두 달 뒤 신청자 박씨는 “나이 든 분들을 통해 알아본 결과, 좌익세력이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박씨는 “아버지로부터 가족들이 좌익들에게 죽었다고 얼핏 듣긴 했으나 진실화해위 1기 보고서에 이 마을 주민 2명이 경찰에 희생된 후 수장됐다는 보고서를 보고 자기 가족들도 비슷한 사건으로 희생됐다고 착각했다”고 답했다고 한다. 박씨 가족은 신안군에서 염전과 농사를 지으며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이들 가족 7명은 좌익들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목돼 마을 앞 바닷가로 끌려가 학살됐다. 시신까지 수장돼 유해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희생된 박씨 가족 중엔 여덟 살 소녀, 열두 살 소년도 있었다. 박씨도 가해 주체를 우리 군경에서 적대 세력으로 바꿔 다시 신청했다.
◇적대세력에서 군경 학살로 바꾼 건 46건
2020년 12월 진실화해위 출범 이후, 우리 군경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며 진실 규명을 요청한 사건 중 인민군이나 좌익 세력의 학살로 드러난 경우가 222건이나 됐다. 본지가 입수한 진실화해위 자료에 따르면, 적대 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으로 신청했으나 군경에 의한 희생으로 드러난 것은 46건이었다. 인민군·좌익 등 적대 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으로 드러난 게 반대 경우보다 5배 가까이 많았다. 신청인이 신청 후 가해 주체를 군경에서 적대 세력, 또는 적대 세력에서 군경으로 변경 요청한 사례는 없었다. 조사관이 조사 과정에서 가해 주체를 확인해 신청인 동의를 얻어 변경했다는 것이다.
◇좌익 소행 드러났는데 군경 학살로 재신청
노무현 정부 때 출범한 1기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인민군 등 적대 세력 소행으로 확인됐는데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으로 재신청한 사건도 있었다. 임모씨는 2021년 6·25 당시 서른이던 아버지가 함평군에서 경찰에 의해 죽었다고 신청했다. 그는 1기 진실화해위에도 진상 규명 신청서를 냈다. 당시 위원회가 마을 주민과 친척을 조사한 결과, 임씨 아버지가 6·25 전 지방 폭도들과 싸운 적이 있어 좌익에게 학살당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신청인 임씨 사촌이 좌익 활동을 하다가 그만두고 행방불명된 뒤 좌익의 표적이 됐다는 증언도 있었다. 위원회는 임씨 아버지가 좌익 세력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보고서까지 냈다. 그런데 아들 임씨가 가해 주체를 군경으로 바꿔 다시 신청한 것이다.
◇가해자 모르면, 군·경찰로 신청 안내도
진실화해위는 2021년 피해자 유족들에게 ‘가해자를 특정하기 어려울 경우 국군·경찰로 기입하라’는 취지의 안내를 했다가 정근식 당시 위원장이 검찰에 고발당하기도 했다. 위원회 홈페이지에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는 경우 국군·경찰 등으로 기입해도 되나요?’라는 질문을 올린 뒤, ‘네 맞습니다. 가해자를 특정하기 곤란한 경우에는 국군, 경찰 등으로 기입하여도 무방합니다’라는 답변을 올린 것이다. 국회에서 논란이 일자 위원회는 안내문을 삭제했다. 탈북자와 국군포로를 지원하는 사단법인 물망초재단 박선영 이사장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허물고 역사적 진실을 왜곡했다”며 정근식 당시 진실화해위원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박 이사장은 진실화해위가 인민군이나 좌익 등 적대 세력보다 군경에 의한 희생자로 보상 신청을 하도록 유도했다고 비판했다.
신청인들이 인민군·좌익세력에 가족이 희생당했는데도 군경을 학살 주체로 지목하는 데는 현행 배·보상 제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군경 학살로 인정되면 보상을 받지만 인민군, 좌익에 의해 살해됐다고 신청하면 국가로부터 한 푼의 보상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군경에 의해 희생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민사재판을 청구해 보상을 받은 이들은 5624명이다. 하지만 인민군·좌익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로 보상을 받은 경우는 없다.
◇인민군 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은 보상 없어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은 “보상을 받기 위해 적대 세력에 의한 학살까지 우리 군경이 했다고 신청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생긴다”면서 “민간인 희생을 보상하는 취지라면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도 군경에 의한 희생처럼 보상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김용판 의원 등 국민의힘 의원 15명은 작년 초 인민군 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도 국가의 배상,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작년 초 공포된 ‘4·3사건 특별법’은 가해 주체를 따지지 않고 희생자 1인당 약 90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수수께끼 같은 6·25 민간인 집단 희생자 통계
진실화해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지난달 9일 과거사 진실 규명 신청을 마감한 결과,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서 우리 군경(軍警)을 가해 주체로 지목한 사건이 9957건, 인민군과 좌익 등 적대 세력을 지목한 사건이 3885건이었다. 가해 주체로 군경을 지목한 사건이 적대 세력을 지목한 사건보다 2.5배 이상 많은 셈이다. 노무현 정부 때 출범한 1기 진실화해위 때 군경을 가해 주체로 지목한 사건은 7922건, 인민군·좌익 등 적대 세력을 지목한 사건은 1687건이었다. 1기 때보다 인민군, 좌익 등 적대 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은 2.3배 증가했다. 하지만 접수 건수만 보면, 6·25 당시 우리 군경이 인민군이나 좌익보다 민간인을 훨씬 더 많이 죽인 것처럼 보인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과 좌익 세력에 학살당한 민간인 숫자는 통계마다 다르다. 1952년 3월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6·25 피살자 명부’에 따르면 5만9994명이다. 1952년 10월 정부가 집계한 북의 피랍자 숫자는 8만2959명(’6·25사변 피납치자 명부’)이다. 전쟁이 한창일 때 작성된 명부라서 빠진 이들이 많을 것이다.
군경에 의한 희생자 숫자도 불명확하다. 좌익 전향자들 중심의 ‘국민보도연맹’ 희생자 숫자가 최대 논란거리다. 1기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으로 보도연맹사건 조사를 이끈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보도연맹 희생자를 10만명 안팎으로 봤다. 적게는 수만명에서 최대 100만명까지 추산한 매체도 있다.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는 “당시 남한 인구와 성인 비율을 참작해서 추산한다면 이런 고무줄 숫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주먹구구식 계산을 비판하기도 했다. 6·25 당시 남한 인구는 2000만명이었다.
1기 진실화해위가 2009년 확인한 희생자 수는 4934명이었다. 위원회는 당시 “국민보도연맹 결성을 관장한 검찰과 경찰 주요 간부들은 보도연맹원 규모가 약 30만명에 달했다고 증언했다”면서 “전체 희생 규모는 알 수 없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또 “청도, 울산, 김해 등 몇 개 군의 경우 보도연맹원 중 약 30~70%가 학살된 것으로 나타났으며 각 군 단위에서 적게는 100여 명 많게는 1000여 명 정도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
항일 독립운동과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권위주의 통치기에 일어난 인권침해 등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설립한 독립적 조사 기관.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출범, 2010년 활동을 마쳤다. 202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개정돼 그해 12월 2기 위원회가 출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