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민석의 플레이볼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608
세계 야구 최강을 가리는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다섯 번째 대회가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2006년 출범해 2009년부터는 4년마다 열린 WBC는 2017년 4회 대회 이후 코로나 펜데믹으로 대회를 한동안 치르지 못하다가 올해 6년 만에 열리게 됐죠.
초대 대회에서 3위, 2009년 2회 대회에선 준우승을 차지한 한국은 2013년과 2017년엔 연속해서 본선 1라운드에서 탈락해 이번 대회에서 명예 회복이 절실합니다.
B조에 속한 한국은 일본 도쿄돔에서 호주(3월 9일)와 일본(10일), 체코(12일), 중국(13일)을 차례로 상대합니다. B조 1위는 A조 2위와, B조 2위는 A조 1위와 도쿄돔 8강전에서 준결승행 티켓을 놓고 겨루죠. 4강에 오르면 미국 마이애미로 넘어가 준결승과 결승을 치릅니다. 대망의 결승전은 22일 펼쳐집니다.
본선 1라운드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는 9일 오후 12시에 열리는 호주전입니다. B조에서 2위에 들어야 8강에 올라가는데 전력상 일본을 1위로 놓는다면, 한국과 호주가 2위를 다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1라운드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가 호주전이라면, 가장 관심을 끄는 경기는 역시 10일 오후 7시에 펼쳐질 일본전일 것입니다. WBC 1·2회 대회 챔피언인 일본은 이번 대회에서도 도미니카공화국, 미국과 함께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는 강팀입니다.
2023시즌을 앞두고 MLB가 매긴 선수 랭킹에서 전체 1위를 달성한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 지난달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1억800만달러(약 1400억원)에 6년 연장 계약을 체결한 다르빗슈 유, 일본 프로야구 NPB에서 최근 두 시즌 연속 투수 트리플크라운(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 1위)을 달성한 야마모토 요시노부(오릭스 버팔로즈), 최근 연습 경기에서 최고 시속 165km를 던진 ‘퍼펙트 게임의 사나이’ 사사키 로키(지바 롯데 마린스) 등 라인업이 휘황찬란 입니다.
그래도 야구는 모릅니다. 한국 야구는 오랜 시간 일본에 전력이 뒤져왔지만, 역대 한일전에서 곧잘 놀라운 결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럼 잠시 추억여행을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 1982년 세계선수권 풀리그 최종전 (5대2 승, 잠실구장)
야구 한일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승부가 1982년 세계선수권입니다. 이 글을 읽은 분 중엔 태어나기도 전에 열린 대회인 분들도 있겠지만, 그동안 영상으로는 많이 접해봤을 대회입니다. 일본과 펼친 대회 최종전이 아주 명승부였거든요.
1982년 9월 14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풀리그 마지막 경기는 이후 한일전에서 자주 등장한 ‘약속의 8회’ ‘8회의 기적’의 시초가 됐습니다. 6승1패로 맞선 두 팀의 대결은 일본이 먼저 기선을 제압했습니다. 2회초 한국의 선발 투수 선동열을 두들겨 2점을 먼저 뽑아냈죠.
7회말까지 상대 선발 스즈키에게 노히트노런을 당하며 한 점도 뽑지 못한 한국의 반격은 8회말 시작합니다.
선두타자 심재원이 중전안타로 1루에 나갔고, 대타 김정수가 중견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때려내며 심재원을 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이후 조성옥이 보내기 번트로 김정수를 3루로 보내자 일본은 스즈키를 내리고 니시무라를 마운드에 올렸죠.
다음 타자는 김재박. 니시무라는 김재박의 번트 시도를 막기 위해 한참 높은 코스에 공을 던졌는데 김재박이 폴짝 뛰어올라 스퀴즈번트에 성공하며 김정수가 홈에 들어왔습니다. 그 유명한 ‘개구리 번트’죠.
극적으로 동점을 만든 한국은 이해창의 후속 안타로 1사 1·3루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은 다시 세키네로 투수를 바꿨죠. 장효조의 땅볼을 잡은 일본은 홈으로 공을 뿌려 김재박을 잡아냈습니다.
2사 1·루에서 등장한 타자는 당시 동국대 4학년이었던 한대화. 그는 세키네의 6구째 슬라이더에 힘차게 배트를 돌렸고, 공은 좌측 담장을 넘겼죠.
잠실구장을 가득 메운 한국 팬들을 열광에 빠뜨린 역전 스리런 홈런이었습니다. 이후 이 장면은 TV에서 애국가가 나올 때 단골로 등장하곤 했죠.
선발 투수였던 고려대 2학년 선동열은 그때까지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9회초에도 등판한 그가 아웃카운트 3개를 잡아내며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세계선수권 정상에 오릅니다. 2011년에 폐지된 이 대회에서 일본은 우승을 차지하진 못했죠.
◇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결정전 (3대1 승, 시드니 베이스볼스타디움)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은 구대성과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불꽃 튀는 완투 대결로 기억에 남는 경기입니다. 한국과 일본은 선발로 나온 두 투수의 구위에 눌려 8회초까지 0-0으로 맞섰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한국엔 ‘약속의 8회’가 찾아옵니다.
8회말 선두타자 박진만이 내야안타를 치고 나갔고, 정수근이 희생 번트로 1사 2루를 만들었습니다. 이어 이병규가 2루수 실책으로 살아나가며 1사 1·3루가 됐지만, 박종호가 아웃되며 2사 1·3루.
다음 타자는 ‘일본 킬러’로 향후 역사에 이름을 아로새긴 ‘국민 타자’ 이승엽이었죠.
이병규의 도루로 2사 2·3루가 된 상황에서 마쓰자카는 이날 3타수 3삼진을 기록하던 있던 이승엽을 얕잡아 봤는지 한가운데에 직구를 집어넣었습니다.
이승엽은 이를 놓치지 않았죠. 좌중간을 뚫는 2루타로 박진만과 이병규가 모두 홈에 들어오며 2-0. 이어 등장한 김동주가 안타로 쐐기 타점을 올리며 한국은 3-0으로 앞섰습니다.
구대성은 9회초 연속 안타를 맞으며 1실점 했지만, 더는 점수를 내주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 지으며 한국은 귀중한 동메달을 수확했습니다. 구대성은 이날 무려 155구를 던지며 11탈삼진을 빼앗았습니다. 상대인 마쓰자카도 160구를 던지는 투혼을 발휘했지만, 결국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죠. 구대성의 역투는 야구 한일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됐습니다.
◇ 2006년 WBC 1라운드 (3대2 승, 도쿄돔)
‘국민 타자’ 이승엽은 2006년 WBC 1라운드에서도 일본을 침몰시킵니다.
당시 도쿄돔에서 열린 1라운드 마지막 경기에 한국은 콜로라도 로키스 소속인 김선우, 일본은 지바 롯데 마린스의 에이스 와타나베 슌스케를 선발로 내세웠습니다.
일본은 1회와 2회 각각 한 점씩 뽑아내며 편안하게 출발합니다. 한국도 3회초 2사 만루의 찬스를 잡았지만 이승엽이 3루수 플라이로 물러나며 점수를 뽑아내지 못했죠.
일본은 4회말 2사 만루의 기회를 잡았고, 니시오카 츠요시가 때린 잘 맞은 공을 우익수 이진영이 몸을 날려 잡아냅니다. 빠졌다면 주자 3명이 모두 들어와 승부의 추가 완전히 기울어질 순간이었죠. 이진영이 ‘국민 우익수’라는 영광스러운 애칭을 얻게 된 장면이었습니다.
한국은 5회초 1사 2·3루 기회에서 이병규가 희생플라이를 치며 한 점을 만회합니다. 하지만 이어진 2사 1·3루 기회에서 이승엽이 삼진으로 또 물러나죠.
시드니올림픽의 영웅 구대성은 7회말 무사 1루 상황에서 등판해 세 타자를 연속으로 처리하며 ‘일본 킬러’의 면모를 또 한 번 확인하죠.
그리고 이번에도 약속의 8회. 2-1로 앞서 있던 일본은 당시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마무리 투수 이시이 히로토시를 마운드에 올렸습니다.
‘이종범의 안타로 만든 1사 1루. 이날 번번이 찬스를 놓쳤던 이승엽이 타석에 섰고, 이시이의 5구째 커브를 그대로 받아치죠. 도쿄돔 우측 상단 스탠드를 때린 비거리 120m 짜리 투런 홈런이었습니다.
한국이 단숨에 3-2로 역전에 성공한 순간이었죠. 이 대회가 끝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할 예정이었던 이승엽은 이 홈런으로 자신이 진정한 아시아의 거포임을 도쿄돔을 가득 메운 일본 팬들에게 각인시켰죠.
구대성이 8회말에도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한국은 9회말 박찬호를 마운드에 올립니다. 박찬호는 “30년 동안 일본을 이기지 못하게 해주겠다”고 말하며 국내 팬들의 공분을 샀던 스즈키 이치로를 내야 플라이로 잡아내며 한국의 승리를 확정 지었습니다. 구대성은 시드니올림픽 동메달결정전에 이어 또 한 번 한일전 승리투수의 영광을 안았고요.
◇ 2006년 WBC 2라운드 (2대1승, 에인절스타디움)
한국은 미국에서 열린 2006년 WBC 2라운드에서도 일본을 잡아냅니다. 이날 한국은 박찬호, 일본은 이번에도 와타나베 슌스케가 선발이었죠.
이번에도 역시 8회에 승부가 갈렸습니다. 0-0으로 맞선 8회초, 김민재의 볼넷으로 만든 1사 1루에서 이병규가 안타를 쳤습니다. 김민재는 3루까지 내달렸는데 타이밍상 아웃이었지만, 3루수 이마에 도시아키가 공을 떨어뜨리며 1사 2·3루가 됐죠.
일본은 후지카와 규지를 마운드에 올렸고, 한국은 이종범이 타석에 나섰습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종범의 2타점 적시타가 터지며 한국은 단숨에 2-0으로 앞섰습니다. 비록 이종범은 3루까지 달리다가 아웃됐지만요. 야구팬들이 국가대표 경기에서 이종범을 생각하면 항상 떠올리는 그 장면입니다.
2-0으로 리드한 한국은 8회말 구대성을 마운드에 올려 무실점으로 막았습니다.
그런데 9회말엔 구대성이 선두타자 니시오카에게 솔로 홈런을 얻어맞았죠. 후속타자에게도 안타를 맞아 1사 1루 위기가 되자 김인식 감독은 2005년 KBO리그 신인왕인 오승환을 호출했습니다. 그는 ‘돌부처’답게 두 명의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한국의 승리를 지켜냈죠. 승리 투수의 영광은 6회에 나와 1과3분의1이닝 동안 무실점한 김병현에게 돌아갔죠.
이날 승리로 한국은 WBC에서 일본을 두 번 연속 꺾으며 일본 야구의 자존심을 확실히 눌러놓았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서재응이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죠. 패배가 확정된 순간 미국 욕설인 “퍽!”을 외친 이치로는 “오늘은 내 인생에서 가장 굴욕적인 날”이라며 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날 패배로 탈락이 예상됐던 일본은 멕시코가 미국을 잡아내면서 극적으로 4강에 올랐습니다. 3패를 했지만, 기묘한 대회 방식이 준 행운이었죠.
그리고 준결승에서 한국은 또 한 번 일본을 만납니다. 이번엔 0대6으로 패하고 말죠. 일본 선발 우에하라 고지에게 7이닝 무실점으로 당한 게 뼈아팠습니다.
결국 우승의 영광은 결승전에서 쿠바를 10대6으로 물리친 일본에게 돌아갑니다. 한국은 1패만 하고도 3패의 일본에 우승컵을 내준 대회가 됐습니다.
◇ 2008년 베이징올림픽 준결승전 (6대2승, 베이징 우커송야구장)
스무 살 김광현이 국민적인 스타로 떠오른 경기입니다. 올림픽 결승 진출을 놓고 한국과 일본이 맞붙었죠.
한국은 1회와 3회, 한 점씩 내주며 끌려갑니다. 4회 이용규의 2루타와 김현수의 안타로 무사 1·3루 찬스를 잡았지만, 이승엽이 병살타를 치며 한 점을 만회하는데 그치죠.
일본은 계투 작전을 펼치며 한국 타선을 6회까지 잘 막아냅니다. 초반에 2실점한 김광현도 이후 호투를 펼치며 추가 실점을 허용하진 않았죠.
한국은 7회 이대호와 고영민의 안타로 만든 1사 1·2루 기회에서 이진영이 적시타를 치며 2-2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이대호 대신 대주자로 나선 정근우의 센스가 돋보인 장면이었습니다. 포수 블로킹을 피해 왼발을 홈플레이트에 스치듯 지나가며 귀중한 1점을 한국에 안겼죠. ‘국민 우익수’ 이진영은 장염에 시달리면서도 대타로 나와 동점타를 때려내며 또 한 번 일본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또 승부는 약속의 8회로 접어듭니다. 일본은 한국 좌타자들을 막기 위해 좌완 이와세 히토키를 마운드에 올렸습니다. 이용규의 안타로 만든 1사 1루의 기회. 타석엔 예선 7경기에서 23타수 3안타로 극도의 부진을 겪었던 이승엽이 등장하죠. 이날 앞선 타석에서도 삼진-병살-삼진으로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대회 타율이 0.115까지 떨어졌죠.
당시 경기장을 찾은 한국 팬들조차 야유하는 상황에서 이승엽의 방망이가 힘차게 돌았습니다. 높이 떠서 잡힐 것 같던 공은 그대로 우익수 뒤 담장을 넘어가 버렸죠.
짜릿한 역전 투런 홈런이었습니다. 또 한 번 8회의 기적을 일궈낸 이승엽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눈물을 보이며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선배로서 후배들 보기에 너무 미안했는데 마음의 빚을 갚은 것 같다”고 밝혔죠.
이어 김동주의 안타가 나왔고, 고영민이 풀스윙으로 큰 타구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너무 높이 떠서 펜스 앞에서 무난히 잡힐 것 같았던 타구를 좌익수 G.G.사토가 떨어뜨리고 맙니다. 허구연 현 KBO 총재가 해설 도중 “G.G.사토, 고마워요”란 역대급 애드립을 하게 된 바로 그 장면이죠.
시간이 흘러 G.G.사토는 2021년 도쿄올림픽 당시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그날 실수로 가족들은 엄청난 취재와 협박에 시달렸고, 죽어버리라는 저주도 많이 들었다”며 “난 일본에서 연관 검색어로 ‘실수’가 뜨는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래도 이로 인해 ‘실패학’ 강의도 다니고 있다”며 웃었습니다. 그에겐 인생을 바꾼 순간이었던 거죠.
G.G.사토의 실책으로 김동주가 홈인하며 한국은 5-2로 앞섰습니다. 이어 강민호의 2루타가 나오며 한 점을 보태며 한국은 승리를 굳혔죠. 한국은 9회초 윤석민을 마무리로 올려 삼자범퇴로 경기를 끝냅니다. 승리 투수는 8이닝 2실점 호투를 선보인 김광현이었고요.
이렇게 일본을 꺾은 한국은 결승에서 이승엽의 선제 투런 홈런과 류현진의 호투를 앞세워 쿠바를 3대2로 꺾고 감격의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죠. 한국 야구 역사에 가장 빛난 장면이었습니다.
◇ 2009년 WBC 1라운드 조 1·2위 결정전 (1대0 승, 도쿄돔)
2009년 WBC는 질릴 정도로 일본과 자주 만난 대회입니다. ‘봉열사’ 봉중근이 맹활약한 대회로 기억에 남아있죠.
한국은 1라운드 첫 경기에선 김광현 등 투수진이 무너지며 일본에 2대14 콜드게임 패배라는 수모를 당합니다.
하지만 이틀 뒤 조 1·2위 결정전에선 1대0으로 승리하며 설욕에 성공했습니다. 한국은 봉중근, 일본은 전 시즌 사와무라상의 주인공 이와쿠마 히사시가 선발로 나왔죠. 이날 경기는 아주 팽팽한 투수전으로 진행됐습니다.
한국은 4회초 이종욱의 볼넷, 정근우의 안타로 만든 무사 1·2루 기회에서 김태균이 적시타를 치며 귀중한 한 점을 뽑아냈습니다.
한국은 6회 1사에서 정현욱을 올리며 필승의 계투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어 류현진과 임창용이 나와 일본 타선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죠. 이날 한국 투수진은 일본에 단 한 개의 볼넷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짜릿한 영봉승을 거뒀습니다. 5와3분의1이닝 무실점의 봉중근이 승리 투수가 됐습니다.
◇ 2009년 WBC 2라운드 승자 결승전 (4대1 승, 샌디에이고 펫코파크)
희한한 대회 방식으로 2009 WBC에서 일본과 세 번째 경기를 펼치게 된 한국은 다시 한 번 일본을 제압합니다. 한국 선발 봉중근과 일본을 대표하는 타자 이치로의 맞대결에 한일 야구 팬들의 관심이 쏠렸죠.
봉중근은 이날 이치로를 완벽히 제압했습니다. 1회 첫 대결에선 느린 커브로 이치로를 내야 땅볼로 잡았고, 3회 무사 1루에선 시속 151km 직구로 3루 땅볼을 유도했죠.
봉중근은 처음으로 주자를 3루까지 보낸 5회 1사 1·3루 상황에서 이치로를 다시 만났습니다. 2구째 커브로 2루 땅볼을 유도했지만, 이치로의 발이 빨라 병살까지 연결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MLB 도루왕 출신의 그도 봉중근의 견제엔 속수무책이었죠. 봉중근이 공을 던질 듯한 제스처에 이치로는 깜짝 놀라 1루 베이스로 되돌아가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2번이나 해야 했습니다.
봉중근의 시원한 어퍼컷 세리머니가 이어지는 가운데 한국은 봉중근에 이어 윤석민, 김광현, 임창용으로 연결되는 계투 작전이 빛을 발하며 일본을 눌렀죠. 5와3분의1이닝 1실점의 선발 봉중근이 승리 투수가 됐고요.
한국 타선은 안타 수에서 4-7로 일본에 뒤졌지만, 1회 집중력을 발휘하며 일본 선발 다르빗슈를 물고 늘어져 선취점을 뽑았습니다. 1번 이용규가 좌전안타에 이어 도루를 성공시켰고, 정근우가 내야안타를 뽑아내 만든 무사 1·3루 기회에서 수비 실책으로 선취점을 뽑았죠.
한국은 이어진 1사 만루에서 이진영이 2타점 좌전 적시타를 터뜨리며 3―0을 만들었고, 3―1이던 8회엔 2사 만루에서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 4―1로 쐐기를 박았습니다. 일본 팬들은 부진한 이치로에게 집중 포화를 퍼부었죠.
◇ 2009년 WBC 결승전 (3대5 패, 다저스타디움)
앞선 세 차례 경기에서 일본에 2승1패를 거둔 한국은 1그룹 1·2위 결정전에서 다시 일본을 만나 이번엔 2대6으로 패합니다.
그리고 한국은 대망의 결승전에서 일본을 또 상대하죠. 독특한 대회 방식으로 일본과 한 대회에서 네 번째 승부를 치르게 된 겁니다.
다시 한 번 봉중근과 이와쿠마의 선발 맞대결이 펼쳐진 가운데 일본이 3회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의 적시타로 한 점을 앞서갑니다. 한국은 5회 메이저리거 추신수의 솔로 홈런으로 따라붙죠.
일본은 7회와 8회 한 점씩 뽑아내며 3-1로 점수를 벌렸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뒷심도 만만치 않았죠. 한국은 약속의 8회에 이대호의 희생플라이로 한 점을 따라붙었습니다.
일본은 9회말 다르빗슈를 마무리로 올렸고, 한국은 2사 1·2루에서 이범호가 슬라이더를 받아치며 극적인 동점을 만들어냈습니다. 또 한 번 기적이 연출된 겁니다.
경기는 결국 연장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일본은 10회초 임창용을 상대로 2사 2·3루 기회를 만들었고, 이치로가 8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2타점 적시타를 치며 5-3으로 앞섰습니다. 부진에 빠져 일본 팬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슈퍼스타가 한국을 상대로 우승으로 가는 결승타를 쳐낸 순간이었죠.
9회말 동점을 내줬던 다르빗슈는 10회말에도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불 같은 강속구로 경기를 마무리하며 일본의 우승을 확정 지었죠.
한국으로선 눈앞에서 우승을 놓친 안타까운 순간이 됐습니다. 그 다르빗슈가 14년 만에 이번 WBC에 나선다고 하니 더 흥미롭게 됐습니다. 다르빗슈는 이번 한일전 선발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 2015년 프리미어12 준결승전 (4대3 승, 도쿄돔)
프리미어12는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선수노조가 설립한 WBCI가 주관하는 WBC와 달리 WBSC(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가 주관하는 대회입니다. 세계 야구 랭킹 12국의 국가 대항전이죠.
초대 대회인 2015년 대회 준결승전에서도 잊지 못한 한일전 명승부가 펼쳐졌습니다. 한국은 당시 개막전에서 일본 선발 오타니 쇼헤이를 전혀 공략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다 0대5로 완패했습니다.
설욕을 다짐했던 한국은 준결승에서 일본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번에도 일본 선발은 오타니였죠.
한국은 준결승에서도 오타니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오타니는 4회 시속 160km를 찍는 등 무서운 구위로 한국 타자들을 제압했죠. 그는 7회까지 삼진 11개를 잡는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한국은 7회초 정근우가 팀 첫 안타를 칠 정도로 무력한 모습을 이어갔습니다. 한국은 선발로 나선 이대은이 3회에 3점을 내주며 끌려갔죠. 그래도 이대은에 이어 나온 차우찬·심창민·정우람·임창민이 점수를 내주지 않으며 희망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약속의 8회에도 침묵했습니다. 오타니 대신 올라온 노리모토 다카히로에게 삼자범퇴를 당하고 말죠.
그런데 이번엔 약속의 9회였습니다. 오재원과 손아섭의 연속 안타로 만든 무사 1·2루 찬스에서 정근우가 좌익선상 2루타를 치며 오재원을 홈으로 불러들였죠. 이어 이용규가 몸에 맞는 공으로 나가며 한국은 무사 만루 기회를 맞이합니다.
일본은 노리모토를 내리고 그해 33세이브를 거둔 스무살 마쓰이 유키를 마운드에 올렸습니다. 김현수가 제구가 흔들린 마쓰이를 상대로 밀어내기 볼넷을 얻어내며 한국은 2-3까지 추격했죠.
다음 타석에 들어선 이는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
2015년 일본시리즈 MVP 출신인 그가 나오자 일본 홈 팬들도 긴장하기 시작했죠. 일본은 다시 투수를 마쓰이 히로토시로 바꿨습니다. 그는 2015시즌 이대호를 상대로 4타수 4삼진을 기록한 천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쓰이의 4구째 포크볼에 이대호의 방망이는 부드럽게 돌았습니다. 이는 2타점 적시타로 연결되며 한국은 단숨에 4-3 역전에 성공했죠.
이대호는 오른손을 번쩍 들며 환호했습니다. 이대호의 야구 인생을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명장면이 됐죠.
한국은 이어 민병헌의 안타로 다시 만루 기회를 잡았습니다. 어느덧 타순이 한 바퀴 돌아 오재원이 다시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여기서 오재원은 희대의 명장면을 만들어 냅니다. 큼지막한 타구를 친 오재원은 배트를 내던지며 홈런임을 직감했죠.
만약 이 타구가 만루 홈런으로 이어졌다면, 한국 야구사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등극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공은 펜스 앞에서 잡히고 맙니다. 정우영 SBS 캐스터의 “오재원은 배트를 던졌고!”란 명중계도 감칠맛을 더한 ‘오열사’의 ‘빠던’이었습니다.
일본에도 남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국은 베이징올림픽 결승전에서 쿠바를 상대로 경기를 마무리한 정대현을 마운드에 올렸죠.
정대현이 투 아웃을 잡아내고 안타를 맞자 김인식 감독은 과감하게 좌완 이현승을 투입했습니다. 이현승은 2015시즌 퍼시픽리그 홈런왕 나카무라 다케야를 땅볼로 잡아내며 경기를 끝냈습니다.
일본에 짜릿한 역전승을 거둔 한국은 결승에 올라 미국을 8대0으로 꺾고 프리미어12 초대 챔피언이 됩니다. 2013년과 2017년 WBC 1라운드에서 탈락한 한국으로선 이 대회마저 부진했다면 아주 우울한 2010년대가 됐을 것 같습니다.
◇ 2021년 도쿄올림픽 준결승전 (2대5 패, 요코하마 베이스볼스타디움)
도쿄올림픽 준결승전은 베이징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서 일본과 만난 경기였습니다. 2012 런던올림픽과 2016 리우올림픽에선 야구가 정식 종목이 아니었거든요.
한국은 사이드암 고영표를 선발로 내세웠고, 일본은 NPB 최강 투수 야마모토 요시노부를 선발 마운드에 올렸습니다.
한국은 3회말 먼저 한 점을 뺏겼습니다. 1사 2·3루에서 사카모토 하야토에게 희생 플라이를 내줬죠. 5회말엔 1사 3루에서 요시다 마사타카에게 적시타를 맞아 0-2로 끌려갔습니다. 고영표는 5이닝 2실점하고 물러났습니다.
야마모토의 구위에 눌려 5회까지 득점을 뽑아내지 못한 한국 타선은 6회초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선두 타자 박해민이 빗맞은 안타를 치고 나갔고, 좌익수가 공을 놓치는 사이 2루까지 진루했고, 다음 타자 강백호가 유격수와 3루수 사이를 뚫는 적시타로 박해민을 홈으로 불러들였죠.
이어 이정후가 안타를 때려내며 강백호를 3루까지 보냈습니다. ‘국가대표의 사나이’ 김현수의 적시타가 터지며 동점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약속의 8회’가 한국을 외면하고 일본에 손을 흔들었습니다.
2-2로 맞선 상황에서 구원 등판한 고우석이 1사 1루에서 곤도 겐스케에게 내야 땅볼을 유도했는데 병살타를 만들 기회에서 1루 커버를 들어가다 베이스를 밟지 못하는 바람에 2사 1루가 됐습니다.
잡을 수 있었던 주자를 살려준 것이 결국 화근이 됐죠. 고우석은 무라카미 무네타카를 고의 4구로 거르고 가이 다쿠야와 상대했으나 볼넷을 허용하며 2사 만루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타자 야마다 데쓰토에게 초구를 얻어맞았죠. 외야 좌중간을 뚫는 2루타로 일본 주자 3명이 모두 홈으로 들어오며 스코어는 2-5로 벌어졌습니다. 한국은 9회초에 득점하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죠.
이날 패배는 2000년 이후 열린 올림픽에서 처음 당한 야구 한일전 패배였습니다. 앞선 두 번의 올림픽에서 일본에 4연승을 거두다 첫 패배를 맛본 것이죠. 일본은 결국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한국은 한일전 이후에도 미국과 도미니카공화국에 연달아 패하며 메달 획득에 실패했습니다.
◇ 2023년 WBC 1라운드 결과는?
야구 한일전의 추억을 되짚어보다 보니 환희의 순간이 정말 많았습니다. 전력 차가 확실한 데도 희망을 한 번 걸어보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최근엔 2019 프리미어12와 재작년 도쿄올림픽까지 일본에 3연패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번 한일전에서 오랜만에 영웅이 탄생할 수 있을까요? 각오는 다들 남다릅니다.
2006년 WBC 한일전에서 일본을 격침한 이종범의 아들 이정후는 대를 이어 일본 사냥에 나섭니다. 2023시즌이 끝나고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그로선 이번 WBC가 좋은 쇼케이스 무대이기도 합니다. 도쿄올림픽 한일전에서 패한 뒤 외야 펜스를 짚고 한참 동안 고개를 숙였던 그가 이번엔 설욕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메이저리그 포지션별 최고 수비수에게 수여되는 2루수 골드글러브를 2021년에 수상한 토미 에드먼과 지난 시즌 유격수 골드글러브 후보인 김하성이 이룰 ‘키스톤 콤비’는 이번 한국 대표팀의 자랑입니다. ‘현수’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에드먼은 최근 연습 경기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올 때 자연스럽게 가슴에 손을 얹는 등 애국심을 과시하며 국내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캡틴’ 김현수는 한국 야구 대표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2008 베이징올림픽과 2009·2013 WBC, 2010·2014·2018 아시안게임, 2015·2019 프리미어12, 2020 도쿄올림픽까지 개근하며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출전한 대회마다 좋은 성적을 올렸죠. 지난 도쿄올림픽에서 타율 0.400, OPS 1.271, 3홈런 7타점으로 맹활약한 그가 이번 WBC에서도 한국 타선을 이끌어 줄 것이라 팬들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전 1루수와 3루수로 각각 나설 박병호와 최정은 국내산 거포의 자존심을 보여줘야 합니다. 박병호는 KBO리그에서 6차례 홈런왕에 올랐고, 최정은 지난해까지 429홈런을 치며 이승엽이 보유한 역대 최다 홈런 기록(467개) 경신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포수 양의지는 그동안 국제무대에서 보여준 부진을 씻을 좋은 기회입니다. 도쿄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역전당하는 순간 더그아웃에서 멍한 표정으로 껌을 질겅질겅 씹는 모습이 중계를 타며 비난을 한몸에 받았던 강백호도 대회를 앞두고 책임감을 강조하며 활약을 예고했습니다.
투수 중에선 고우석이 명예 회복에 나섭니다. 도쿄올림픽 한일전에서 결정적인 수비 실책으로 팀 패배의 원흉이 되었기 때문에 그 악몽을 떨쳐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기전에선 마무리의 존재감이 더욱 크기 때문에 소방수 고우석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6일 오릭스전에서 목 부근을 주무르며 통증을 호소한 뒤 마운드를 내려간 그는 다행히 단순 근육통으로 진단받아 출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두 레전드 좌완 투수 김광현과 양현종은 이번 WBC가 마지막 국제 대회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김광현은 베이징올림픽 이후 한일전 성적이 신통치 못했고, 양현종은 2019년 프리미어12 결승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선발로 나와 3이닝 4실점으로 부진했던 아픔이 있습니다. 두 베테랑이 자신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한일전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팬들의 관심이 쏠립니다.
지난해 투수 골든글러브 수상자인 안우진이 학폭 논란으로 대표팀에 선발되지 않은 상황에서 구창모는 젊은 에이스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그는 프로 2년 차였던 2017년 APBC(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에 나갔다가 일본에 쓴맛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일본과의 개막전에 4-1로 앞서던 6회 등판했다가 2점 홈런을 허용했죠. 한국은 이후 동점을 내줬고, 승부치기 끝에 7대8로 졌습니다.
구창모가 2020시즌 전반기에만 9승을 올리며 센세이션을 일으킬 때만 해도 구대성·봉중근·류현진·김광현 등 그동안 국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특급 좌완 계보를 이을 선수로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부상이 길어지면서 도쿄올림픽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죠.
구창모는 7일 한신과 벌인 평가전에서도 공인구 적응에 애를 먹으며 볼넷을 남발했습니다. 그가 살아나야 한국 야구에도 희망이 생깁니다. 자, 이제 설레는 마음으로 WBC를 맞이해 볼까요?
장민석의 플레이볼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