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철(왼쪽)과 김태균의 타격 폼. 좀처럼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문상철은 김태균의 타격 폼을 따라 한 뒤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 중계화면 캡쳐

한화의 레전드 김태균(38)을 1군 경기에서 못 본지 제법 오래됐다. 김태균의 올 시즌 1군 마지막 경기는 8월 15일 삼성전. 그날 이후 팔꿈치 부상으로 2군으로 내려갔던 김태균은 2군에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면서 자가격리로 훈련까지 중단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1군에 다시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김태균이 없는데도 김태균이 보인다.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리지만 김태균의 타격 폼을 벤치마킹한 타자가 연일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 그는 바로 KT 위즈의 문상철(29)이다.

배명고-고려대를 나온 문상철은 2014년 특별 지명으로 KT 유니폼을 입었다. 오랜 시간 KT 팬들의 기대를 받았지만 좀처럼 가능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1홈런 7타점을 친 2016시즌과 2홈런 7타점의 2019시즌이 그동안 커리어 하이 시즌이라 할 만큼 눈에 띄는 활약이 없었다.

문상철은 올 시즌에도 7월까지 타율이 0.197에 그쳤다. 7월엔 16번 타석에 서서 단 1안타에 그쳤다. 김강 KT 타격 코치는 문상철에게 왼발을 드는 대신 땅에 붙인 채 스윙할 것을 제안했고, 절박한 문상철도 이에 동의했다. 타격 자세에 대한 조언을 구해야 했던 문상철은 발을 땅에 찍고 치는 타자가 KT엔 없어 이 타격 폼으로 KBO리그에서 전설적인 기록을 남긴 김태균에게 도움을 청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거나 그런 적이 없어 문상철과 별다른 인연이 없던 김태균은 낯선 후배의 부탁에 기꺼이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늦은 밤까지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문상철은 “김태균 선배의 문자를 참고해 나만의 리듬을 만드는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문상철은 최근 맹활약하며 KT의 2위 질주에 큰 힘을 보태고 있다. / 허상욱 스포츠조선 기자


김태균의 타격 폼을 복제한 문상철은 1군에 다시 복귀한 9월 10일부터 매섭게 방망이를 돌렸다. 이른바 ‘태균 스쿨’ 이전에 석 달 동안 타율 0.197, 2홈런 9타점을 기록했던 그는 김태균의 타격 자세를 따라 한 뒤 9월에만 타율 0.429, 5홈런 9타점을 올렸다. 이강철 감독도 문상철의 방망이가 뜨겁게 달아오르자 5번 타자로 기용하며 타선에 무게감을 더했다.

2일 LG전에서도 문상철의 활약이 이어졌다. 1회초 안타를 치며 타격감을 끌어올린 그는 2-2로 맞선 8회말 1사 1·3루 상황에서 천금 같은 1타점 적시타로 팀에 3-2 리드를 안겼다. 송은범의 공을 받아쳐 깔끔한 중전 안타를 만들어냈다.

마지막이란 각오로 대선배에게 조언을 구해 새롭게 타격 폼을 바꾼 문상철은 KT의 2위 질주에 큰 힘을 보태고 있다. 최근 7경기만 따지면 3홈런 11안타 5타점의 맹활약이다. 그 기간 KT는 5승2패의 좋은 성적을 거뒀다.

문상철은 “그동안 야구를 잘한 적이 없어 최근의 좋은 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어떻게 하면 꾸준히 잘 칠 수 있을 까란 생각뿐이다. 안주하지 않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지금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노시환은 한화에서 '제2의 김태균'을 꿈꾸고 있다. / 연합뉴스


김태균의 소속팀 한화에도 ‘태균 스쿨’ 수강생이 있다. 한화 팬들이 미래의 거포로 꼽는 노시환(20)이다. 노시환의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223, 9홈런 34타점으로 탁월한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엔 확실히 좋아졌다. 바꾼 타격 폼에 적응을 한 시점인 9월 20일부터 따지면 타율 0.341, 8타점을 치고 있다.

노시환은 “2~3주 전부터 레그 킥을 하지 않고 다리를 찍어놓고 때리는 방식으로 타격 폼을 바꿨다”며 “김태균 선배에게 많이 배우고 있다. 김태균 선배와 같은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올 시즌을 앞두고 유튜브 ‘이글스 TV’에 출연한 김태균은 후배 노시환를 두고 “우리 시환이는 너무 예쁘다”며 “지난 시즌엔 ‘어떻게 저런 선수가 신인이지? 정말 굉장하다’라고 느꼈다. 한화에서 나보다 한참 더 높은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후배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김태균은 “형이 한화에 17년간 있으면서 MVP를 한 번도 못해봤다. 너는 꼭 MVP를 해서 팀의 우승에 큰 공헌을 하는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고 노시환에게 덕담을 건넸다. 김태균은 올 시즌 도중 노시환에게 스파이크와 배팅 장갑을 선물하기도 했다.

김태균처럼 발을 땅에 찍고 치는 폼으로 최근 좋은 활약을 보이는 노시환은 거포가 사라진 한화에 희망을 안겨주는 존재다. 노시환은 “9개까지 홈런을 쳤으니 올 시즌 10개 이상 치도록 하겠다”며 “공격과 수비 능력을 두루 갖춘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