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락부락한 거포의 시대는 잊어라. 대세는 날렵한 ‘클러치 히터(clutch hitter·득점 기회가 생겼을 때 안타를 치는 타자)’다. 프로야구 외국인 타자 위상이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개막 한 달된 시점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외국인 타자들은 황소 같은 체격으로 대포를 쏘아 올리며 압도하기 보단, 매의 눈으로 출루하고 결정적 순간에 투수들을 흔드는 유형이다.

◇신바람 난 SSG ‘에헤라디야’

MLB(미 프로야구)를 떠나 올 시즌 합류한 SSG 기예르모 에레디아(32·쿠바)는 지난 7일 고척 키움전에서 4번 타자 겸 좌익수로 선발 출전해 6타수 4안타 2타점을 올렸다. 5월 들어 6경기 타율 0.458(24타수 11안타) OPS(출루율+장타율) 1.083. 결승타도 2개다. 그새 SSG는 5연승하며 1위(20승10패·승률 0.667) 굳히기에 나섰다.

에레디아는 홈런은 3개(공동 11위)뿐이지만 타율 1위, 타점 2위, 득점권 타율 7위다. 도루는 4개. 외국인 선수 중에선 KIA 소크라테스 브리토(31)와 함께 가장 많다. 타석과 주루 전반에서 맹활약하며 팀 더그아웃에서도 분위기를 북돋우는 ‘응원단장’을 자처하고 있다. 팬들 사이에서 본명보단 쾌재를 부를 때 외치는 ‘에헤라디야’로 알려져 있다.

에레디아는 “타석에서 안타나 출루할 수 있는 방법만 고민한다. 이런 마음가짐이 득점권 상황과 타점 성적에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 같다”면서 “팀 수가 (MLB 때보다) 적어 상대했던 투수들을 반복적으로 만나는 점이 흥미롭다. 즐거운 야구를 통해 팬들에게 보답하겠다”고 했다. 류지현 KBS N 해설위원은 “에레디아는 장타보단 타율 쪽에서 (SSG가) 기대를 걸고 뽑았던 선수인데, 적응을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인 타자 저주 깰 LG 오스틴

오스틴 딘(30·미국)은 ‘LG 외국인 타자의 저주’를 깰 선수로 평가받는다. LG는 그동안 외국인 타자의 무덤으로 통했다. 2020시즌 로베르토 라모스(29)가 역대 팀 외국인 타자 최다 홈런(38개)을 기록했지만 부상에 시달리며 오래 못 갔다. 이후 저스틴 보어, 리오 루이즈, 로벨 가르시아 등은 기대 속에 왔다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오스틴도 시범 경기 기간 타율이 0.194에 머무르며 ‘또 저주가 시작되나’ 싶었다. 하지만 정규시즌 들어서 각성했다. 타율 0.336(110타수 37안타) 3홈런 25타점 OPS 0.855. 타점 3위, 타율 9위다. 7일 잠실 두산전에선 2회 초에 3점포를 날려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최대 강점은 변화구 대처 능력. 현재 슬라이더(0.435), 커브(0.500), 스플리터(0.300) 등 주요 변화구들을 상대로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오스틴은 “LG 외국인 타자 잔혹사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난 그 저주를 깨부수러 왔다”고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LG 구단에선 “오랜만에 ‘밥값’을 하는 외국인 타자가 왔다. 성적도 좋으니 외국인 투수들인 케이시 켈리, 애덤 플럿코와도 잘 어울린다. 마침 셋 모두 미국인”이라고 했다.

◇재수(再修)에 성공 키움 러셀

2020시즌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가 저조한 성적(65경기 0.254 2홈런 31타점)으로 짐을 쌌던 키움 에디슨 러셀(29·미국)은 재수생 신분으로 돌아와 이름값을 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2016년 MLB 시카고 컵스 월드시리즈 우승 멤버. 3년 전에는 이국땅이 낯설었던지 방황했으나 올해는 27경기 타점 1위(28타점)에 득점권 타율은 0.545다. 팀 타점(106타점)의 26%를 홀로 뽑아냈다. 양상문 SPOTV 해설위원은 “그동안 팀들은 홈런형 거포를 영입하기 위해 집중했는데, 실패 사례가 거듭됐다. 점점 짧고 빠른 스윙을 통한 ‘안타 기계’ ‘출루 기계’형 외국인 타자들이 리그에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