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울산HD 감독으로 마지막 경기를 치른 홍명보(오른쪽) 신임 축구 대표팀 감독. 그의 뒤로 ‘거짓말쟁이 런명보’ ‘명(멍)청한 행보’ 등 그를 비난하는 현수막들이 관중석에 펼쳐져 있다. /연합뉴스

‘홍명보 사태’는 아직 진행형이다.

대한축구협회가 지난 7일 홍명보(55) 전 울산 HD 감독을 차기 국가대표 사령탑에 내정했다고 발표한 이후 절차와 상식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 와중에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13일 홍 감독을 공식 선임했다.

10~12일 진행한 ‘서면 이사회’에서 23명 중 21명의 동의를 받았다. 이사회 승인까지 끝낸 홍 감독은 15일 외국인 코치를 뽑기 위해 유럽으로 나갈 예정이다. 본격 업무에 돌입한 셈이다.

그러나 논란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많은 축구 관계자는 홍 감독은 물론, 이 파행적 선임 과정에 최종 책임이 있는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까지 물러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래픽=정인성

◇ 원칙 없이 오락가락… 축구 팬들 분노

이번 사태는 사실 지난해 3월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선임 때부터 배태됐다. 당시 협회는 클린스만을 왜 어떻게 뽑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밀어붙였다. ‘협회장과 친분이 있어 발탁됐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클린스만은 외유 논란에 아시안컵 졸전까지 겹쳐 지난 2월 부임 11개월 만에 경질됐다. 그러자 엉성한 협회 행정을 두고 비판 여론이 커졌다.

이후에도 협회 오판은 이어졌다. 공석이 된 대표팀 감독 선임이 미뤄지면서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을 지휘할 임시 감독이 필요했는데 여기에 황선홍 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차출한 것이다.

올림픽 지역 예선을 앞둔 그에게 굳이 ‘투 잡’을 맡겨야 하느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강행했다. 이 오판은 이후 40년 만에 올림픽 축구 본선 진출 실패라는 참사를 야기하면서 협회 행정은 한번 더 궁지에 몰렸다. 여기에 이번 홍 감독 선임 과정마저 석연치 않게 이뤄지면서 축구계 전체가 반발하는 양상이다.

대표팀 사령탑 선임 작업을 관장한 전력강화위원회(전강위)에서 활동했던 전 국가대표 박주호는 8일 본인 유튜브를 통해 “전강위는 앞으로 필요 없다. 절차 안에서 이뤄진 것이 하나도 없다. 5개월 동안 무얼 했나 싶어 허무하다”고 밝혔다. 협회가 이에 대해 법적 대응을 검토한다고 하자 팬들은 “박주호를 보호하자”며 해당 영상에 1만6000개가 넘는 응원 댓글을 달았다. 축구협회 전무를 지낸 박경훈 수원 삼성 단장은 “정확한 진상은 알 수 없지만 절차에 하자가 많아 보인다”고 했다.

◇ 한국행 의지 드러낸 마시와 바그너 외면

5개월 동안 전강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축구협회 정관을 보면 대표팀 감독은 전력강화위원회(전강위)에서 추천해 이사회 승인을 받아 임명하는 걸로 나와 있다. 전강위는 5월초 외국인 감독 두 명을 최종 후보로 올렸다.

EPL(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즈 사령탑을 지낸 제시 마시(51·미국)가 1순위, 현 이라크 감독인 헤수스 카사스(51·스페인)가 2순위였다.

특히 마시는 지난 4월 정해성 위원장과 면접 자리에서 한국 대표팀의 지난 아시안컵 모든 경기를 분석해 한국의 아쉬운 플레이로 1시간 영상을 만든 다음 이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게 맞는지를 3D로 구현해 올 만큼 적극적이었다.

6일 캐나다의 코파 아메리카 4강 진출이 확정된 후 기뻐하는 제시 마시 캐나다 감독. / AP 연합뉴스

2001년 제주월드컵경기장 개장 경기에 자신이 미국 대표로 뛰었다는 이력까지 소개하며 친근감을 표시한 마시는 EPL 시절 연봉의 3분의 1 수준을 받겠다며 한국 감독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지만, 협회와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면접 이후 한동안 협회의 연락이 없어 마시 측에서 먼저 협상을 제안할 만큼 협회 반응이 미온적이었다는 후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강위원은 “마시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최상의 카드란 생각에 결렬 소식을 듣고 전강위 내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며 “국내 체류 기간과 세금 등에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이는 협회가 융통성 있게 풀 수 있는 문제라 아쉬움이 컸다”고 말했다. 마시는 한국에 요구한 연봉 수준과 비슷한 조건에 캐나다 대표팀 감독을 수락했고, 두 달 뒤 코파 아메리카에서 4강 진출을 달성했다.

이후 다시 감독 후보자 선정 작업에 들어간 전강위는 최종 후보 4명을 추렸다. 카사스가 다시 후보에 포함된 가운데 거스 포옛(57·우루과이), 다비트 바그너(53·미국), 홍명보 감독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지난달 정해성 전강위원장은 돌연 사표를 냈다. 정해성 위원장은 홍명보 감독을 후보 1순위로 추천한 명단을 올렸지만, 협회 고위층이 이를 탐탁치 않아 하면서 협상이 난항에 빠지자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전강위원은 “정 위원장이 최종 후보를 협회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협회 수뇌부가 거스 히딩크가 추천한 그레이엄 아널드 호주 감독을 언급한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이 갑자기 물러나면서 혼란 속에 이임생 기술본부 총괄이사가 권한을 물려받았다. 그는 포옛과 바그너를 면접하러 유럽 출장길에 올랐다.

포옛은 EPL 선덜랜드 등을 거쳐 최근 그리스 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바그너는 EPL 허더스필드와 분데스리가 살케에서 지휘봉을 잡은 감독이다. 둘 중 한국 대표팀 사령탑에 대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바그너였다.

협회가 요구하는 수준(세전 200만달러·28억원)으로 연봉을 맞추고 협상에 임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자신의 축구 철학과 훈련 모델 등을 담은 50페이지 분량의 프리젠테이션과 함께 한국 선수 50명의 장단점을 분석한 자료를 준비했다. 바그너는 18세 양민혁(강원)까지 포함된 이 명단을 통해 한국은 레프트백 포지션이 취약하며 김민재의 중앙 수비 파트너를 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이임생 축구협회 기술이사가 8일 기자회견을 열고 홍명보 감독을 차기 사령탑으로 선임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 뉴스1

◇ 전강위 건너뛰고 독대 후 결정

이임생 이사는 바그너와 면접을 마친 날 비행기를 탔고, 한국에 도착한 5일 밤 홍명보 감독 집으로 찾아가 그를 독대했다. 당일 수원FC전을 치를 때만 하더라도 감독 선임 가능성을 강력하게 부인했던 홍 감독은 하루 만에 입장을 바꾸었다. 그는 “전강위에서 내가 어떤 평가를 받았냐고 물었고, 이임생 이사는 내가 최고점을 받았다고 했다. 밤새 고민한 끝에 다음날 수락했다”고 말했다.

협회는 7일 오후 감독 내정 사실을 발표했는데 최종 제안을 협회에 보내고 결과를 기다리던 바그너 감독은 이 사실을 에이전트로부터 전해 듣고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협회는 외국인 감독 후보들에게 결과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내정 발표를 먼저 하는 결례를 범한 것이다.

이임생 이사는 8일 기자회견에서 “정 위원장 사임 이후 정 회장이 모든 권한을 줬다”며 “9명 전강위원 중 사퇴 의사를 밝힌 4명을 제외한 5명 위원에게 화상회의를 거쳐 권한과 책임을 위임받았다”며 선임 절차를 설명했다.

이에 대해 한 전강위원은 “이 이사가 두 외국인 감독에 대해선 심층 면접 과정을 거친 반면 홍 감독에겐 그냥 가서 ‘해주세요’라고 한 것이 아닌가”라며 “아무 상의가 없었다. 이 이사에게 ‘어떻게 결정이 된 것이냐’라고 물었더니 그 과정은 말할 수 없다고 하더라. 통화 시간은 1분이 채 안됐다. 일방적 통보에 가까웠다”고 전했다.

이 위원은 “감독 후보를 찾는 과정이 유럽 인맥이 있는 박주호 위원 등 몇몇 ‘개인 기량’에 의존하는 느낌을 받았다”며 “협회의 감독 스카우팅 시스템이 매우 낙후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위원은 “그동안 전강위는 위원들이 추천한 인물 중 논의를 거쳐 후보를 추려내 1차 화상 미팅을 하고 괜찮으면 위원장이 해외로 나가 만난 결과를 위원들과 공유하면서 진행됐다”며 “그런데 이번엔 전강위를 배제한 채 독단적으로 홍 감독을 만나 결정을 내렸다. 절차를 무시했다”고 말했다.

이임생 이사는 두 외국인 감독 후보는 “한 명은 롱 볼(긴 패스)을 추구하고, 다른 한 명은 전방 압박을 즐겨 사용해 우리 철학과 맞지 않았다”고 모호하게 깎아내린 뒤 홍 감독에 대해선 리더십과 전술, 경험 등 8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이 역시 “전강위 논의 절차도 없이 어떻게 나온 근거냐” “홍 감독을 미리 정해놓고 이유를 끼워 맞춘 인상” 등 팬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이사회 승인 과정도 개운하지 않다. 전 협회 간부는 “이사회에서 승인하지 않았다면 어쩌려고 발표부터 하느냐”고 했다. 서면 이사회 역시 인사 또는 긴급 특별 사안에 대해 열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한 축구협회 이사는 “이사회가 이런 식으로 운영되다 보니 의견을 개진할 창구가 없다”고 말했다.

축구 팬들은 협회가 한창 시즌을 치르는 현직 K리그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빼간 상황에 대해서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축구 선진국인 잉글랜드나 독일, 스페인 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행태다. 10일 K리그 경기장을 찾은 울산 팬들이 “홍명보 나가!” “정몽규 나가!”를 외친 이유다.

지난 2월 클린스만 경질을 발표하는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 / 뉴스1

◇ “협회 인적 쇄신 필요하다”

시스템을 무시한 불공정한 감독 선임 절차에 비판이 쏟아지면서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공식 석상에 나서 사과와 함께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린다. 지난 12일 “협회 체계 자체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강도 높게 비판한 박지성 전북 현대 디렉터는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의 사퇴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결국 회장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고 직격했다.

이번 이사회에 서면으로 참여한 한 협회 이사는 “회장 주위 참모들의 역량이 너무 떨어진다”며 “회장 눈치만 볼 뿐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없다. 인적 쇄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축구협회 관계자도 “주요 사안의 핀트를 못 잡고 결정을 내려야 할 타이밍도 번번이 놓친다”며 “20, 30년 전 사고에 머무른 인사들이 축구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협회 내부를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