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월드컵 H조 3차전 가나와 우루과이의 경기에서 가나의 모하메드 살리스(오른쪽)가 우루과이의 루이스 수아레즈와 볼을 차지하기 위해 경합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전광판의 시계가 멎고 7분이나 지난 후반 52분, 가나 축구대표팀 감독 오토 아도는 0대 2로 끌려가던 그때 대기심에게 선수 교체 의사를 내비쳤다. 이미 주어진 추가 시간을 거의 다 쓴 상태라, 현실적으로 16강 진출에 필요한 2골을 넣을 시간이 없던 때였다. 1골을 먹히면 우루과이가 한국을 골득실차로 제치고 16강에 진출하는 상황.

뭘 해도 뾰족한 수가 없던 그 시간대, 가나는 굳이 최전방에서 뛰던 공격수 모하메드 쿠두스를 빼고 공격수 압둘 파타우 이사하쿠를 넣었다. 쿠두스는 터벅터벅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지는 팀은 보통 총알 같이 선수 교체를 진행하는데, 뭔가 달랐다. 경기 종료 1분도 안 남은 상황에서의 느릿한 선수 교체, ‘시간 끌기’에 들어간 것이었다.

느릿느릿 들어온 이사하쿠가 뜀박질을 시작할 때쯤 경기는 바로 끝났다. 한국 시간 3일 오전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H조 조별 예선 최종전 가나와 우루과이의 경기에서 가나가 2골만 내준 덕에 한국은 우루과이와 같은 승점에 같은 득실차에도 다득점으로 16강에 진출하게 됐다.

가나의 공격수 7번 압둘 이사하쿠가 후반전 추가 시간 7분이 넘어선 시각 경기장으로 투입되고 있다 /KBS

이 경기 하이라이트는 1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경기를 뒤집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나가 시간 끌기용으로 선수를 교체했던 장면이었다. 군자(君子)는 복수하는데 10년도 기다린다는데, 가나는 12년을 기다렸던 것일까.

3일 오전 가나와 우루과이 경기가 끝난 직후, 우루과이의 16강 패배를 알리는 기사 하단에 달린 댓글에서 가나의 선수 교체 이유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추가 시간 다 보내고 1분도 안 남은 그 순간 선수 교체를 하는 건 ‘목적’이 있어서다. 넣어 봐야 1골 정도 더 넣을 수 있는 시간만 남았었다. 1골을 넣더라도 가나에겐 의미 없었다. 어차피 이기지 못하면 16강에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교체는 그냥 우루과이를 절대 16강으로 보낼 수 없다는 뒷다리 잡기용 교체였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을 기다려도 부족하다는데 가나는 12년 걸린 듯.”

무슨 복수일까.

가나와 우루과이의 악연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이래 우루과이의 공격수 루이스 수아레스는 가나의 주적이었다. 당시 월드컵 8강전에서 우루과이와 붙었던 가나는 1대 1로 진행되던 연장전에서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회심의 슛을 때렸지만, 이를 막아낸 건 골키퍼의 손이 아닌, 공격수 수아레스의 손이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8강 경기 연장전 1대 1로 비기던 상황에서 가나의 슛팅을 손으로 막아내는 우루과이의 공격수 수아레스 /FIFA 제공

수아레스는 자신의 진영 골문에 서서 정면으로 날아오는 가나 도미니카 아디이아 헤더를 손으로 쳐냈다. 수아레스는 핸드볼 파울로 바로 퇴장 당했고, 페널티 킥을 얻은 가나가 이를 실패하며 결국 우루과이가 승부차기 끝에 4대 2로 이겼다.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처럼 은밀하게 손을 써서 공격수가 골을 넣는 장면은 가끔 있었지만, 이처럼 말도 안 되는 기행으로 ‘골을 막았던 공격수’는 월드컵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수아레스의 기행 탓에 가나는 4강 진출에 실패한 것이었다.

12년 만의 리턴 매치를 앞둔 한국 시간 2일 H조 4팀의 기자회견에서 ‘그날의 일’에 대한 사과 의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수아레스가 한 말은 가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때 나 레드 카드 받았잖나. 사과 않겠다.”

수아레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가나 선수가 페널티 킥 실축한 게 내 잘못인가? 내가 만약 가나 선수에게 부상을 입혔다면 사과했을 것”이라며 “난 당시에 레드 카드를 받았다”고 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충분한 처분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가나 팬들이나 선수들이 날 향해 ‘복수심’을 품는다면, 그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고 덧붙였다.

누리꾼들은 수아레스의 이 기자회견 답변이 가나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본 것이다.

이와 동시에 가나 감독 오토 아도가 이날 기자회견에서 남긴 말도 재조명됐다. 아도는 “2010년 일어났던 일은 매우 슬픈 일이었다”면서 “과거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늘 중요하다”고 말했다. 우루과이는 별일 아니라고 치부했던 그 일이 가나에겐 ‘매우 슬픈 일’이었고 ‘복수의 기회’로 보였던 셈이다.

두 번째 원정 16강 진출 /뉴시스

결국 가나의 12년 걸린 복수극 덕에 한국은 12년 만에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날 한국은 전반 5분 포르투갈 공격수 히카르두 오르타에게 골을 먹으며 0대 1로 끌려 가다, 전반 막판 김영권의 동점골과 후반 추가시간의 황희찬 역전골로 2대 1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