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KIA를 응원해.” 이 말을 듣고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면, 당신은 기성 세대일 확률이 높다. MZ세대(1980년대~2000년대 출생)는 e스포츠의 리그 오브 레전드(LoL) 구단인 ‘담원 KIA’를 떠올린다. 한국시리즈를 11차례 제패한 KIA 타이거즈는 국내에서만 유명하지만, 담원 KIA는 지난해 한국을 포함한 12개 지역별 리그 22개팀이 출전한 LoL 월드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세계적인 구단으로 발돋움했다. 담원 KIA와 중국의 쑤닝 게이밍이 맞붙은 결승전은 16개 언어로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가 14일 서울 종로구 E스포츠 롤파크 경기장에서 ‘리그오브레전드’ 게임을 체험하고 있다. 2021.6.14 [국회사진기자단]](https://www.chosun.com/resizer/v2/VMZRP2MDBVJ5XAZEGPF54ZQQ5M.jpg?auth=2b5e2dcbd403c27d11c896750f7ee33190dc19f63df7e9d30bf87c68fdbaf25f&width=1280)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람 간 접촉을 금지시키면서 야구·축구·테니스 등 기존 스포츠들은 대회가 줄줄이 취소돼 큰 타격을 입었다. 선수들의 연봉은 삭감됐고 팬들은 관전 기회를 잃었다. 반면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e스포츠는 날개를 달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전 세계 e스포츠 시장 규모는 2019년 1조원대에서 최근 3조원대로 커졌다. 시청자 수는 약 5억명인데 35세 이하가 85%를 차지한다.
자본과 인재가 몰리는 곳에는 미래가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기업들은 게임 산업에 어떻게든 자사의 브랜드를 노출시키려고 안간힘이다. 그래야 MZ세대와 친밀감을 쌓아 미래 소비자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까닭이다. 가령 대기업 SK는 올 초 프로야구단 SK와이번스를 신세계에 매각했지만, LoL 구단 ‘T1’에는 천문학적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돈과 인재가 몰리는 LoL
지난 6월 초 서울 용산 CGV에서 열린 LoL의 한국 프로리그(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 이하 LCK) 미디어데이에 가봤다. 10개 구단 선수와 감독이 나란히 참석해 각오를 말했다. 선수들이 대부분 안경을 썼고, 우락부락 근육질 체형이 아니라 가시처럼 말랐으며, 이마를 앞머리로 완전히 덮은 것이 기존 스포츠 현장에서 봐왔던 모습과 달랐을 뿐 나머지 풍경은 여느 스포츠 행사와 비슷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지금껏 국내 야구장이나 축구장에선 한번도 맡지 못했던 물씬한 돈 냄새였다. 미디어데이는 CGV가 LCK 경기만 전담해 중계하는 전용 상영관에서 열렸는데, 앞다퉈 후원사를 자처하는 기업들의 로고가 컴컴한 스크린을 은하수처럼 수놓았다. 화룡점정은 글로벌 주얼리 브랜드 티파니의 가세였다.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커미셔너 트로피)를 비롯해 북미 4대 프로스포츠 우승컵과 우승반지를 전담해온 티파니는 올해부터 LCK 우승팀의 반지 제작을 맡는다. 국내 프로야구나 축구계엔 언감생심인 일이다.
스포츠 전문가들도 이곳으로 몰린다.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프로게임단 젠지는 메이저리그 수석 부사장을 역임했던 크리스 박을 CEO로 영입했고, 류현진의 LA다저스 시절 통역으로 친숙한 마틴 김이 최고수익책임자(CRO)로 일한다. 이들은 기존 스포츠 업계에서 쌓은 노하우를 로켓처럼 성장하는 e스포츠에 접목시켜 더욱 큰 판으로 키우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다.

◇기업들 “10~20대 고객을 잡아라”
10~20대 젊은 층에게 눈도장 찍으려는 기업들은 업종을 막론하고 e스포츠에 뛰어든다. 특히 중국과 북미에서도 팬 층이 두터운 LoL 구단을 선호한다. 유통 업계에선 농심이 작년 12월 ‘농심 레드포스’를 창단했고, hy(구 한국야쿠르트)는 ‘프레딧 브리온’ 네이밍 스폰서로 참여해 자사 온라인 쇼핑몰(프레딧)을 홍보한다. 동원F&B는 ‘KT 롤스터’ 유니폼에 동원참치를 써붙였고, 롯데칠성음료는 ‘아프리카 프릭스’를 통해 에너지음료 핫식스를 광고한다.
금융권에선 한화생명이 젊은 고객들을 끌어모으려고 3년 전 e스포츠 구단을 창단했다. 우리은행은 LCK와 2023년까지 파트너십을 맺고 저축 계좌를 만들면 LoL 인기 아이템을 지급하는 식으로 마케팅을 펼친다. 국민은행은 자사 모바일 플랫폼 브랜드 ‘리브’를 LoL구단 ‘샌드박스’ 이름 앞에 넣어 홍보하고, 하나은행은 자산 30억원 이상 고객들만 관리하는 수퍼리치 자산전담팀이 T1 선수들의 재테크 전략을 짠다.
신한은행은 레이싱게임 카트라이더 대회의 타이틀 스폰서를 맡아 지난해 20대를 겨냥해 출시한 금융 브랜드 ‘헤이 영’을 리그 명칭으로 붙였다. 은행연합회는 MZ세대가 향후 10년 내 세계 노동인구의 약 75%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농구 황제도 뛰어드는 e스포츠
e스포츠는 명사들에게 전도유망한 투자처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 MLB 스타 알렉스 로드리게스, F1 드라이버 페르난도 알론소, 가수 제니퍼 로페즈, 배우 애쉬튼 커쳐 등은 5~6년 전부터 최소 1500만달러(약 170억원) 이상 e스포츠 팀에 투자했다.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이 투자한 게임단 ‘길드 e스포츠’는 지난해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e스포츠 구단 가치는 천정부지로 뛴다. 미국의 프로게임단 TSM은 홍콩의 암호화폐거래소 FTX가 네이밍 스폰서가 돼 구단명을 ‘TSM FTX’로 바꾸는 대가로 10년간 2억1000만달러(약 2400억원)를 받는다. 이는 MLB나 NBA에서 구장 명명권을 갖기 위해 기업들이 쓰는 돈과 맞먹는 수준이다. 포브스는 지난해 TSM의 구단 가치를 4억1000만달러(약 4600억원)로 평가했는데, NFL 명문 구단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와 금액이 비슷했다.
1990년대 LA레이커스 ‘공룡 센터’이자 NB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샤킬 오닐(49)은 2016년부터 미국의 e스포츠 구단 NRG의 초기 투자자로 참여하고 있다. 농구 전설이 e스포츠 시장에 뛰어든 계기는 자녀들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어느 날 ‘스테이플스 센터로 데려가달라’ 조르는 거예요. 거기는 LA레이커스의 홈 구장인데. 제가 의아해하자 ‘거기서 LoL 월드챔피언십이 열린다’고 하더군요. 고작 게임을 그 큰 경기장에서 한다는 게 안 믿겨져 반신반의하며 가봤더니 제 아이들 또래 3만명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어요. 지금껏 농구장에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충격적인 광경이었죠. 그때 깨달았어요. 미래는 e스포츠에 있다고.”
◇e스포츠에 미래가 있다
과거 프로스포츠는 “땀도 안 나는 게 무슨 스포츠냐”며 e스포츠를 무시했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네 종목을 게임으로 만들고 최고 스타를 홍보 모델로 쓰며 젊은 팬 영입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가령 메이저리그는 야구 게임 ‘더 쇼' 모델로 마이크 트라우트(LA에인절스)나 애런 저지(뉴욕 양키스) 등 슈퍼 스타들을 내세워 광고한다. e스포츠로 새 길을 만들지 않으면 이대로 쇠락하다는 절박함이 있다. ESPN에 따르면 오프라인 스포츠는 팬들의 평균 연령대가 40대가 훌쩍 넘지만, e스포츠는 20대가 주축이다. 이 밖에도 피파온라인과 위닝 일레븐, 풋볼 매니저 등 여러 히트작이 있는 축구를 비롯해 NBA(2K), NFL(매든), F1(온라인 그랑프리) 등 종목마다 공격적으로 게임 마케팅을 한다. MZ세대는 과거처럼 실제 경기를 보고 특정 구단의 팬이 되기보다, 선수를 아바타 삼아 게임을 해보면서 자연스레 팬이 되어 구단 티켓과 유니폼 판매로 이어진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FIFA(국제축구연맹)는 지난해 수입의 60%가 축구 게임 라이선싱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2019년엔 게임 수입 비중이 20%였다.
변화의 물결 앞에선 IOC(국제올림픽위원회)도 자유롭지 않다. IOC는 오는 23일 개막하는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지난 5~6월 ‘가상 올림픽’을 열었다. 종목은 5개(야구, 조정, 사이클, 요트, 자동차 경주).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은 3년 전만 해도 “e스포츠가 신체 활동이 아니고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는 올림픽 정신에 부합하지 않아 정식 종목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최근 들어 “가상 경기로 젊은 세대에 올림픽의 가치를 알리고 싶다”고 말하는 등 태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선 e스포츠가 정식 종목이다.
전직 프로게이머이자 게임방송 스타트업을 창업한 닉 쿠오모는 “전 세계에 게이머가 27억명 넘게 있기 때문에 앞으로 e스포츠 시장이 얼만큼 커질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면서 그동안 전통 스포츠의 하위 개념으로 인식됐던 e스포츠가 ‘e’ 꼬리표를 떼고 가장 영향력 있는 종목으로 올라설 날이 멀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스포츠의 구성 요소는 선수와 팀, 리그, 경기장, 방송사, 시청자인데 이미 e스포츠가 완벽하게 갖춘 것들입니다. 스포츠는 무조건 땀 뻘뻘 흘려야 한다는 편견을 버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