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오픈 메인 스타디움인 스타드 롤랑가로스엔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했다고 전해지는 격언이 적혀 있다. 선수들은 벤치에 앉아 쉴 때 마다 정면에 있는 이 말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Victory belongs to the most tenacious(가장 끈기 있는 자에게 승리를).”

남자 단식 결승전이 열린 12일(한국 시각). 세계 3위 노바크 조코비치(36·세르비아)가 ‘GOAT(Greatest of all time·역대 최고)’를 향한 유례없는 끈기를 드러내며 역대 최다 메이저 대회(호주오픈·프랑스오픈·윔블던·US오픈) 우승 대기록을 달성했다.

노바크 조코비치가 12일 열린 프랑스오픈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와 함께 기뻐하고 있다. /로이터 뉴스1

이제 그만큼 메이저 대회에서 많이 우승한 남자 선수는 아무도 없다.

노바크 조코비치가 12일 열린 프랑스오픈 결승전에 임하는 모습. /로이터 뉴스1

◇코트에서 나뒹굴면서 ‘차세대 흙신’ 제압

조코비치는 이날 혈투 끝에 그보다 11살 어린 카스페르 루드(25·노르웨이·4위)를 세트스코어 3대0(7-6<7-1> 6-3 7-5)으로 눌렀다. 3시간 13분 만에 우승을 확정짓자 라켓을 떨어뜨리고 코트에 드러누워 감격했다. 루드와 악수를 나눈 뒤엔 한동안 코트에 주저 앉아 흐느꼈고, 관중석으로 달려가 가족과 코치진의 품에 안겼다.

‘전설’과 ‘차세대 흙신’의 대결답게 초반엔 불꽃이 튀는 혈투가 이어졌다.

1세트에서 조코비치는 첫 번째 서브 게임부터 내주며 루드에게 한때 0-3으로 끌려갔다. 강력한 스핀이 가미된 스트로크를 앞세우고 능숙한 드롭샷을 구사하는 루드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루드는 작년 대회 준우승자이자 나달 아카데미 수강생답게 ‘흙신’ 라파엘 나달(37·스페인·15위)의 육신에 빙의한 듯했다.

하지만 프랑스오픈에서 나달도 꺾어 본 조코비치였다. 이후 서브 게임을 착실히 지키고 브레이크(break)에도 성공하며 4-4 균형을 맞춘 뒤 승부를 타이 브레이크까지 끌고 갔다. 타이 브레이크에선 내리 3점을 따낸 뒤 오직 1점만 허용하고, 다시 4연속 득점하며 1시간 30분이나 이어진 기나긴 1세트 승부를 끝맺었다.

1세트 때 공을 받아내다 코트에서 미끄러져 나뒹굴고, 온 힘을 쏟아내며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조코비치의 집념은 아무도 저지할 수 없었다.

2세트에선 이번엔 조코비치가 루드의 첫 서브 게임부터 빼앗으며 순식간에 3-0으로 격차를 벌렸다. 그리고 몸놀림이 둔해진 루드를 이리저리 흔들며 2세트까지 6-3으로 챙겼다.

노바크 조코비치. /로이터 연합뉴스

3세트에선 두 선수가 5-5까진 침착하게 서브 게임을 지켜냈다. 그러나 조코비치가 승부처인 11번째 게임에서 스트로크 싸움에서 우위를 보이며 내리 4득점을 꽂아 넣으며 6-5로 앞서 나갔고, 본인의 서브 게임까지 지켜내며 결승전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날 역사적인 결승전을 보기 위해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몰리기도 했다. 프랑스 프로축구 파리 생제르맹에서 뛰는 킬리안 음바페(25), 최근 은퇴를 선언한 ‘스웨덴 득점기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41), NFL(미 프로풋볼) 최고 쿼터백 출신 톰 브래디(46) 등이 눈에 띄었다.

프랑스오픈 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 12일 경기장을 찾은 킬리안 음바페(왼쪽)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EPA 연합뉴스

◇테니스 ‘GOAT’ 논쟁에 종지부?

조코비치는 2023 프랑스오픈 우승과 함께 수많은 대기록을 남기게 됐다. 이번 우승과 함께 남자 테니스 ‘GOAT’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주관적인 감정이 아닌 객관적인 수치로만 따지면 조코비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선수는 사실상 없다.

노바크 조코비치가 12일 열린 프랑스오픈 남자 단식 결승전에서 우승한 뒤 트로피와 함께 엄지를 치켜 세우고 있다. /AP 연합뉴스

우선 조코비치는 전인미답의 메이저 대회 단식 23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라이벌’ 나달과 나눠 갖고 있던 기존 기록(22회)을 갈아 치웠다. 호주오픈 10회, 프랑스오픈 3회, 윔블던 7회, US오픈 3회 우승에 빛난다. 나달이 부상으로 올해 프랑스오픈에 불참한 데 이어 투어 복귀 시기 자체가 미지수인 반면 조코비치는 올해 호주오픈과 프랑스오픈을 연달아 제패하는 등 여전히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하다. ‘23′이라는 숫자가 더 커질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번 대회 우승올 통해 조코비치는 역대 최고령 프랑스오픈 남자 단식 챔피언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기존 기록은 지난해 나달이 달성한 만 36세 2일이었는데, 이를 만 36세 20일로 소폭 늘렸다.

그리고 4대 메이저 대회에서 각각 3회 이상 우승한 역대 최초의 선수로 등극했다. 20회 우승한 로저 페더러(42·스위스·은퇴)는 프랑스오픈에서 단 한 번(2009년) 정상에 올랐고, 나달은 호주오픈과 윔블던에서 2회씩 우승하는 데 그쳤다.

조코비치는 역대 최장 기간(387주), 통산 수입 등 여러 부문에서 이미 1위를 달리고 있다. 큰 부상이 없는 한 향후 2~3년 더 건재할 것으로 보이는 조코비치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3주 뒤에 열릴 윔블던에서도 그는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