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서(24)의 ‘원맨쇼’가 끝났다. 세계 1인자가 바둑사(史)의 한 페이지를 새로 쓰면서 한 중 일 3국 국가대항 연승전인 농심배는 25회째 대회인 올해도 한국의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4년 연속 우승이다.

23일 중국 상하이 그랜드센트럴 호텔 대국장. 막판 가슴 철렁한 순간을 겪었다. 무난하게 우세를 유지해가던 신진서가 갑자기 우중앙 일대서 난조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헤쳐나왔다. 249수 끝 흑 불계승. 중국 최후의 보루이자 톱랭커인 구쯔하오(26)가 결과를 확인하곤 고개를 떨궜다. 19일부터 이어진 강행군을 신진서가 5연승으로 장식하면서 이창호의 ‘상하이 대첩’을 19년만에 재현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에 마무리 6연승을 안기며 한국 4연속 우승을 이끈 신진서.

지난해 12월 4일 부산서 열린 2라운드 최종전 승리를 포함하면 신진서의 연승 횟수는 6이다. 이창호와 신진서 자신이 6회 및 22회 대회서 한 번씩 작성한 마무리 5연승 기록을 이번에 깬 것. 누구도 흉내내지 못 할 초인적인 레이스였다.

“큰 판을 이겨 뿌듯하다. 첫 판을 둘 때만 해도 먼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6연승까지 해 영광이다. 컨디션엔 문제가 없었다. 대국 때 우승을 생각하다가 좋지 못한 바둑을 둔 것 같다. 마지막까지 정신을 바짝 차려 이길 수 있었다. 오늘 대국이 가장 어려웠고 한 번쯤은 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대국 후 신진서가 밝힌 소감이다.

신진서가 한국 4번 주자 박정환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았을 때 한국의 승리 잔고(殘高)는 제로였다. 설현준 변상일 원성진 박정환 등 1~4번 주자가 1승도 못 올린 탓이다. 마지막 주자 신진서가 남은 여섯 판을 전승해야 우승이 가능했다. 6연승의 산술적 확률은 0.0156. 1.5%가 약간 넘는 좁은 문이다.

중국팀 최종 주자 구쯔하오. 신진서에게 재역전 당하면서 분루를 삼켰다.

농심배 연승이 어려운 것은 휴식없이 연일 출전해 푹 쉬고 나온 상대를 대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기 장소는 중국선수들의 홈그라운드였다. 객지에 나와 싸우는 신진서로선 체력 부담 등 여러 면에서 크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신진서는 난국을 영리하게 돌파했다. ‘한 입’에 6승을 해결 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한 판, 한 판을 따로 대응하는 ‘살라미 전술’로 임했다. 신진서와 동행한 홍민표 대표팀 감독은 “불안해하는 기색을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다”고 했다. 신진서의 차분함에 오히려 중국 선수들이 부담감에 짓눌리다 일패도지했다. 특정국 선수 5명이 경쟁국 1명에게 몰살 당한 것은 이 대회 사상 처음이다. ‘신진서 혼자 중국 14억을 눕혔다’는 말까지 나온다.

신진서는 기술적으로도 한 단계 올라선 경지를 보여주었다. 전·현직 세계 우승자가 즐비한 중국 선수들은 채 100수도 못 돼 인공지능 승률 한 자릿수로 추락하기 일쑤였다. 이희성 9단은 “수읽기가 끝을 모를 정도로 깊어졌다”고 놀라워했다.

신진서는 최종국 승리로 농심배 통산 16연승 기록도 함께 세웠다.

준비성도 완벽하다. 23일 구쯔하오전 초반엔 전날 홍민표 감독과 함께 연구했던 포석이 등장했다. 그는 대국 상대에 따라 맞춤 전략으로 응하는 성실함으로 유명하다. 전날 딩하오전 역시 준비한 변화가 나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한국이 이번 대회서 기록한 전적 6승 4패 중 6승은 신진서가 홀로 따낸 것이고, 4패는 나머지 4명의 패수(敗數) 합계다. 중국의 성적표도 흥미롭다. 총 7승 4패 중 7승은 선봉장 셰얼하오 혼자서 따냈고, 그를 포함한 중국 선수 5명 전원이 신진서에 의해 제거됐다.

신진서가 워낙 발군이다 보니 한국 바둑의 ‘신진서 의존증’이 갈수록 고착화 돼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농심배만 보더라도 4년 연속 신진서의 마무리 덕으로 우승이 가능했다. 연승 방식 대회에서 최종 주자의 1승은 무엇보다 값지다. 22~25회 대회 4년간 신진서가 마지막 주자를 맡아 쌓아올린 승수가 16연승에 달한다. 이 역시 농심배 최고 기록이다.

구쯔하오(왼쪽)와 신진서의 최종국 장면. (사진=한국기원)

올해 전적 19승 1패로 승률이 무려 95%에 이른다. 2개 국제대회(LG배·잉씨배) 포함 현역 8관왕이다. 2012년 프로 진입 후 통산 승률은 79.0%(783승 208패). 외국기사 상대 승률은 75.8%(270승 86패)를 기록 중이다. 한국은 16회째 우승 전리품으로 5억원의 상금을 챙겼다. 중국과 일본은 각각 8회, 1회 우승했다.

중국 팬들도 절대 강자에 대한 외경심으로 신진서에 대해 험담하지 않는다. 과거 이창호를 추앙하던 분위기가 재현되고 있다. 이번 대회 기간 동안 상하이 시민들은 신진서의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일정 탓에 5분으로 제한했을 정도였다. 반대로 참패한 자국 톱 플레이어들에 대한 성토가 각종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달구기 시작했다. 이 역시 20여년 전 이창호 전성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