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영이 5일 프랑스 파리 포르트 드 라 샤펠 아레나에서 열린 파리 올림픽 여자 배드민턴 단식 결승에서 중국 허빙자오를 꺾고 금메달을 확정한 직후 코트에 무릎을 꿇고 포효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결국 해냈다. 배드민턴 안세영(22·삼성생명)이 올림픽 여자 단식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이 종목에서 28년 만에 다시 찾은 금메달이다. 여자 단식 세계 1위 안세영은 5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 포르트 드 라 샤펠 아레나에서 펼쳐진 파리 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결승전에서 9위 허빙자오(중국)를 게임 점수 2대0(21-13 21-16)으로 완파했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방수현 이후 이 종목 첫 금메달이자, 배드민턴 전체로 따져도 2008 베이징 올림픽 혼합 복식 이용대·이효정 이후 16년 만이다. 이로써 한국 선수단은 파리 올림픽 11번째 금메달(금11·은8·동7)을 따냈다. 이날 사격에서는 조영재(25·국군체육부대)가 남자 25m 속사권총 은메달을 추가했다.

안세영의 결승전은 전과 달랐다. 안세영은 8강전과 4강전에서 모두 상대에게 1게임을 먼저 내주고 2·3게임을 잡아 역전승을 일궜다. 조마조마하게 경기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결승에선 승부수를 빨리 띄웠다. 몸을 날려 상대 공격을 걷어내는 ‘질식 수비’와 코트 구석구석을 찌르는 송곳 스매시가 효과를 보면서 1게임을 8점 차로 승리했다. 2게임에선 4점 차로 앞서다가 11-11 동점을 허용했지만, 다시 분위기를 가져와 비교적 손쉽게 경기를 끝냈다. 안세영은 이날 경기 전까지 허빙자오에게 8승 5패, 올해는 3승 1패로 앞서고 있었다.

안세영이 5일 프랑스 파리 포르트 드 라 샤펠 아레나에서 열린 파리 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결승에서 중국 허빙자오를 2대0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확정한 뒤 두 팔을 벌려 기뻐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안세영은 이제 그랜드슬램에 퍼즐 하나만을 남겼다. 그랜드슬램은 아시아 선수에겐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선수권을 모두 제패하는 것. 작년 세계선수권과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그는 “그랜드슬램 달성이 목표”라면서 “올림픽 금메달이 사실상 마지막 퍼즐”이라고 했다. 지난 4월 아시아선수권에서 허빙자오에게 진 게 옥에 티였다. 일단 올림픽 결승에선 복수에 성공했다. 그는 “파리에서 낭만 있게 끝내고 싶다”고 한 각오대로 금빛 피날레를 장식했다.

안세영은 2017년 12월, 만 15세 나이로 성인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하며 ‘천재 소녀’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듬해 출전한 2018 아시안게임 32강에서 탈락해 눈물을 흘렸다. 메달을 기대했던 2021년 도쿄 올림픽 때도 8강에서 미끄러졌다. 아픔은 그를 더 단단하게 했다. 이후 여자 단식 ‘빅 4′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 정상급 선수가 됐다. 그래도 야마구치 아카네(일본)와 천위페이(중국) 등 숙적들에겐 여러 차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달라졌다. ‘수비형’ 선수였던 안세영은 고된 레슬링 훈련 등을 자청하며 체력을 길렀고, 공격력까지 장착하면서 전천후 선수로 거듭났다. 그동안 쉽게 이기지 못했던 라이벌들을 연달아 격파했고, 세계선수권 등 주요 대회들을 휩쓸며 세계 1위로 거듭났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단체전과 개인전 결승에서 모두 천위페이를 제압하고 2관왕에 올랐다. 기세를 몰아 올림픽 챔피언으로 섰다. 안세영은 “올림픽을 앞두고 새벽, 오전, 오후에 반복적으로 뛰고 사이클을 타면서 체력 훈련에 집중했다”며 “어떤 순간에도 이걸 깨지 않고 포기하지 않은 게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키 포인트”라고 했다.

안세영은 이제 방수현을 뛰어넘는 한국 여자 배드민턴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선수권과 올림픽을 모두 석권하는 건 방수현도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다. 방수현의 세계선수권 최고 성적은 1993년 대회 은메달이다. 안세영은 “꿈이 이뤄져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며 “부상 때문에 매 순간 두려웠고 숨을 못 쉬었는데 참으니까 이렇게 숨통이 트이고 환호할 수 있는 순간이 왔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더 많은 기록을 써 내려가는 게 목표”라고 했다.

오른쪽 무릎에 테이핑을 한 채 결승전 뛴 안세영. /뉴시스

안세영 부모도 이날 관중석에서 열띤 응원을 보냈다. 쉴 새 없이 북을 치며 “대~한민국!” “안세영 파이팅”을 외쳤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에 선 딸을 보며 눈물도 흘렸다. 어머니 이현희씨는 쉰 목소리로 “밤새 한숨도 못 잤다”며 “항상 세영이에게 경기가 끝나면 ‘잘 이겨냈다’고 말해준다. 오늘도, 이번 대회도 잘 이겨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 안정현씨는 “온 우주를 얻은 기분이다. 경기장에 오신 한국 국민들, 교포들뿐만 아니라 외국 분들도 세영이를 열심히 응원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다만 돌발 상황도 벌어졌다. 안세영은 경기가 끝나고 “이 순간을 끝으로 대표팀과 함께하긴 힘들 것 같다”고 선언했다. 향후 국제 대회에 개인 자격으로 출전할 뜻을 내비친 셈이다. 그는 “항저우 아시안게임 이후 부상이 심각했는데 안일하게 생각한 대한배드민턴협회에 실망했다”고 밝혔다.

안세영은 작년 아시안게임 여자 단식 결승전 도중 무릎 힘줄이 파열되는 부상을 당하고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승리하는 투혼을 보였다. 그러나 충분한 휴식과 재활을 거치지 않고 국제 대회 출전을 강행했다. 부상 후유증이 따라다녔다. 배드민턴계 관계자는 “협회에서 처음에 정확한 부상 부위와 상태에 대해 오진을 해서 소속 팀을 통해 다른 병원에서 제대로 진단받았다”면서 “부상에 대해 별다른 관리를 해주지 않아 대표팀에 불만이 컸는데, 올림픽을 위해 참고 견뎠던 걸로 안다”고 전했다.

안세영은 “오진을 한 순간부터 계속 참으며 경기를 해왔다. 다시 검진을 받아보니 많이 안 좋더라”라며 “올림픽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참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트레이너 선생님이 도와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배드민턴만 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이든 다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협회가 모든 걸 막고 있다고 본다. 배드민턴이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금메달 하나밖에 안 나오는 결과를 보고 협회가 한번 돌아봐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