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문 대표팀 감독이 5일 미국전에서 6회말 조상우의 교체를 지시하고 있다. / 요코하마=최문영 기자

5일 일본 요코하마 베이스볼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한국과 미국의 야구 패자 준결승전. 2대7로 미국에 패한 한국의 더그아웃엔 결승 진출 실패의 아쉬움에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앉아 있던 선수가 있었다. 이날의 선발 투수였던 이의리(19·KIA)였다.

한·일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을 이틀 앞둔 2002년 6월 16일에 태어난 열아홉 살 이의리는 도쿄올림픽 결승행이 달린 이날 미국전에 선발 등판했다. 10대(代)의 나이에 감당하기 쉽지 않은 임무를 맡았지만, 5이닝 2실점으로 훌륭히 역할을 해냈다. 미국 강타선을 상대로 삼진도 9개나 빼앗았다. 그런 그이기에 이날의 패배는 더욱 아쉬웠을 것이다.

이번 올림픽을 통해 KBO리그 최고 타자임을 입증한 이정후도 경기가 끝나고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패배는 늘 아쉽고 때로는 분노를 자아낸다. 그리고 승부욕은 성장의 자양분이 된다.

하지만 경기 후 공식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경문 대표팀 감독의 발언은 귀를 의심케 했다.

“꼭 금메달을 따겠다는 마음만으로 일본에 온 것은 아닙니다. 한 경기 한 경기 국민과 팬들에게 납득이 가는 경기를 하려고 왔습니다. 금메달을 못 딴 건 크게 아쉽지 않습니다.”

금메달을 못 딴 것이 아쉽지 않다고? 김 감독의 이 말은 늦은 밤까지 TV를 보며 금메달을 기원한 팬들의 입장에선 절로 힘 빠지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이날의 이의리처럼 금메달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한 선수들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팀의 수장이 할 말은 아니었다.

물론 메달의 색깔이 전부는 아니고, 메달을 못 땄다고 해서 실패한 올림픽이라 단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쉽지 않다”고 할 만큼 이번 올림픽 금메달이 불가능한 목표도 아니었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했다.

그렇다면 김경문 감독이 말한 대로 대표팀은 국민과 팬들이 납득할 만한 경기를 했을까. 이날 미국전의 승부는 6회말에 갈렸다. 이의리가 5이닝 2실점으로 버텨준 덕분에 1-2로 팽팽한 경기를 펼친 한국은 6회말에 무려 5점을 내주며 무너졌다. 불펜 운용의 실패가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6회말 구원 등판한 최원준은 곧바로 볼넷을 내줬다. 차우찬이 마운드에 올라 원아웃을 잡았지만, 다음에 등판한 원태인이 연속 안타와 볼넷으로 1점을 내주고, 1사 만루 위기를 맞았다.

김경문 감독은 조상우를 구원 투수로 마운드에 올렸다. 하지만 조상우는 이번 대회 지나치게 많은 공을 던지고 있었다. 1일 도미니카공화국전부터 4일 일본전까지 3경기에 나와 66개의 공을 던진 조상우는 닷새간 네 번째 등판인 이날 눈에 띄게 구위가 떨어져 보였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잭 로페스의 적시타가 터지며 4-1, 에디 앨버레즈의 1루 땅볼로 5-1이 됐다. 조상우는 타일러 오스틴에게 중전 안타를 맞으며 점수는 7-1까지 벌어졌다. 여기서 이날의 승부가 갈렸다. 이번 대회 5경기에 나선 조상우의 투구 수는 101개다.

전체적으로 투수 운용이 매끄럽지 않았다. 올해 KBO리그에서 선발로 나섰던 원태인과 최원준은 익숙하지 않은 구원 역할을 맡아 번번이 위기를 초래했다. 투수진의 불균형으로 조상우에겐 과부하가 걸리며 6회 대량 실점으로 이어졌다.

미국전의 김경문 감독. / 뉴시스

기자회견에서 구원 전문 투수를 더 데려갔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이 나오자 김 감독의 대답은 이랬다.

“결과를 갖고 이야기한다면 감독이 할 말은 별로 없습니다. 중간을 많이 뽑았다면 지금 선발 투수들이 이닝을 이 정도 던지는데 중간 투수들이 매일 던지면 되겠어요? 스태프들이 생각이 있으니 이렇게 뽑았겠죠. 아직 마지막 경기가 남아 있으니 좀 더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첫 문장은 말할 가치도 없다. 스포츠가 결과로 말하는 것인데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감독이 할 말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다음 문장. 중간 투수에 대한 발언은 대표팀 선발 당시로 돌아가 보자. 김경문 감독은 지난 6월 올림픽 대표팀 엔트리를 발표했다. 당시 평균자책점 0.55에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 구원 1위였던 한화 강재민이 뽑히지 않아 야구팬들 사이에선 논란이 됐다.

김 감독은 당시 강재민을 제외한 이유에 대해서 “이번 올림픽이 많게는 8경기를 해야 한다. 여러 투수로 짧게 짧게 잘라 막으면서 경기를 운용할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이 말도 팬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강재민은 한화에서 1~2이닝을 책임지는 경우가 많았다. 김 감독의 말처럼 짧게 짧게 잘라 막기 위해선 강재민 만한 투수가 없다.

‘중간을 많이 뽑았다면 지금 선발 투수들이 이닝을 이 정도 던지는데 중간 투수들이 매일 던지면 되겠어요?’란 김 감독의 말은 선발 투수를 이만큼 뽑아서 그나마 이닝을 소화했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런데 ‘중간 투수들이 매일 던지면 되겠어요?’라고 의문을 표했지만 중간 투수 조상우는 이번 올림픽에서 사실 거의 매일 던졌고, 결국 무리가 오면서 미국 타선을 당해내지 못했다.

김 감독이 주장하는 대로 이번 대회엔 선발 투수들을 많이 데려갔지만, 원태인과 최원준, 박세웅 등은 구원 역할을 주로 수행했다. KBO리그에서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지키면서 던졌던 이들은 이번 올림픽에서 1~2일 간격으로 구원 등판하며 컨디션 조절에 어려움을 겪었다. 등판 결과도 좋지 않았다.

다음 문장인 ‘스태프들이 생각이 있으니 이렇게 뽑았겠죠’는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대표팀 구성은 감독의 고유 권한인데 그 책임을 자신이 아닌 스태프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들린다. 감독이라면 응당 내가 구성한 대표팀이기 때문에 내가 책임진다고 해야 했었다.

김 감독 말대로 아직 마지막 경기는 남아 있다. 한국은 7일 낮 12시 도미니카공화국과 동메달 결정전을 벌인다. 하지만 이렇게 동메달을 딴들 과연 야구 팬들은 환호할까.

야구는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정한 개최국 지정 종목이라 출전 가능선수가 144명으로 제한됐다. 출전 국가당 엔트리가 24명이므로 6팀만 나왔다. 올림픽 대부분 종목은 두 번을 패하면 메달을 획득할 기회가 사라지는데 야구는 ‘더블 일리미네이션’이라는 복잡하고 기이한 대회 진행 방식 때문에 이미 세 번 진 한국에도 동메달 가능성이 남아 있다.

6팀 중 3위를 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을 일이다. 하지만 “금메달을 못 딴 것이 아쉽지 않다”고 한 김 감독의 말에 많은 팬들은 동메달 결정전을 응원할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