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31일 보리스 존슨 당시 영국 총리가 환희에 찬 성명을 발표했다. “놀라운 희망의 순간입니다. 위대한 국가적 드라마를 위해 여명이 동트고 있습니다. 되찾은 주권으로 이민을 통제하고 자유 무역항을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이날 밤 영국은 유럽연합(EU)의 전신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한 지 47년 만에 EU를 떠났다.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를 묻는 국민투표가 가결된 지 3년7개월 만이었다. 경제·사회를 망라한 수많은 EU 규제를 적용받지 않게 됐다. 밀려드는 외국인 입국도 제한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EU와 결별한 지 3년이 지난 요즘 독자적인 영국을 되찾았다는 환호는 사라졌다. 대신 ‘외톨이 경제’의 우울한 그림자가 짙어졌다. 인플레이션, 에너지·식품 공급난, 노동 인력 부족이라는 글로벌 경제 3대 악재가 유독 영국에서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EU와 자유무역을 끊어버린 탓에 수출입 통관에 투입하는 시간·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에 따른 불확실성 증가로 무역 감소와 투자 지체가 뚜렷하다. EU 회원국 국민의 자유 왕래를 막은 여파로 노동력이 부족해 몸살을 앓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G7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영국만 역성장(-0.6%)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일본(1.8%)·캐나다(1.5%)·미국(1.4%)이 1%대 견조한 성장을 이뤄내고, 프랑스(0.7%)·이탈리아(0.6%)·독일(0.1%)도 플러스 성장을 이어갈 것이라는 IMF 예측과 비교해 영국의 ‘나 홀로 뒷걸음질’이 두드러진다. IMF는 전쟁 중인 러시아(0.3%)보다 영국 성장률을 1%포인트 가까이 낮게 내다봤다. 영국에는 굴욕이 아닐 수 없다. 런던 킹스칼리지의 조너선 포테스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브렉시트 여파로 펑크가 나서 서서히 바람이 빠지는 타이어처럼 영국 경제가 둔화될 것”이라고 했다.
특히 고물가 파도가 유럽 본토보다 훨씬 강력하게 휘몰아치고 있다. 브렉시트로 대영제국의 부활을 노렸지만, 실제로는 ‘고립된 섬’으로 움츠러들 것이라는 저주가 현실이 되고 있다. 일상이 고달파진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브레그레트’(Bregret·브렉시트에 대한 후회)라는 표현이 나오는 중이다.
◇브렉시트로 연간 GDP 153조원 손실
브렉시트 타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중동부 링컨셔주(州)다. 이곳은 밀려드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반감으로 EU 탈퇴를 가장 열망한 지역으로 꼽혔다. 그러나 요즘에는 민심이 달라졌다. 지역 경제가 위축돼 주민들이 동요하고 있다.
지난 연말 ‘정치 조(PoliticsJoe)’라는 팔로어 28만명을 거느린 유명 유튜버가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 전국 최고 찬성률(75.6%)을 기록한 링컨셔주 보스턴시 주민들을 인터뷰했다. 한 중년 남성은 “(다수 의견을 무작정 따르는 현상인) 밴드왜건 효과로 국민투표 때 찬성표를 던졌지만 이제는 EU 탈퇴에 분명히 반대한다”며 “더 많은 외국인이 일하러 와야 한다”고 했다. 한 20대 남성은 “정치인들이 세상 전부를 주무를 수 있을 것처럼 굴었고, 주민들은 마약에 취한 것처럼 판단을 제대로 못했다”고 했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브렉시트 후폭풍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석달 전 링컨셔의 대표적인 수산물 공장인 ‘파이브 스타 피시’가 폐쇄돼 400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생선을 수입해 손질하는 이 공장은 팬데믹 이후 매출이 줄어든 데다 브렉시트로 수산물 수입 통관을 위한 서류 작업이 지나치게 복잡해지자 아예 문을 닫았다. 소유주인 아이슬랜드계 자본은 영국 사업을 접고 유럽 본토 공략에 집중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글로벌 식품 제조 기업 바카보르(Bakkavör)가 비용 절감을 위해 링컨셔 소재 공장의 폐쇄를 결정했다. 300여 명이 일터를 떠나야 한다. 링컨셔 주민들은 브렉시트를 외친 정치인들한테 속아 넘어갔다는 조롱을 받고 있다.
링컨셔뿐 아니라 영국 전역이 ‘고립 경제’의 유탄을 맞아 활력을 잃고 주저앉고 있다. 런던의 민간 싱크탱크 CER은 지난달 브렉시트를 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한 경제 모델과 비교해 브렉시트 이후 2022년 2분기까지 영국에서 국내총생산(GDP) 5.5%, 투자 11%, 무역 7%가 각각 감소했다고 분석했다.
브렉시트로 경제 규모가 쪼그라드는 건 통관 절차 부활→무역 감소→투자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영국의 GDP 대비 무역액 비율은 2019년 63%에서 2021년 55%로 뚝 떨어졌다. 코로나 사태 전후로 G7 가운데 경제 규모가 줄어든 나라는 영국뿐이다. 2019년 4분기와 2022년 2분기 국내총생산(GDP)을 비교하면 영국은 0.2%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미국(2.6%), 캐나다(1.7%), 이탈리아(1.1%) 등이 충격을 딛고 일어선 것과 대조적이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국민투표를 실시한 2016년 2분기 이후 브렉시트 탓에 발생한 GDP 손실을 연간으로 환산하면 1000억파운드(약 153조원)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브렉시트 찬성파들은 7년 전 국민투표를 앞두고 “연 108억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EU 분담금을 더 이상 내지 말자”고 외쳤다. 하지만 막상 브렉시트를 해보니 GDP 손실액이 EU 분담금의 9배에 달한다는 얘기다.
앞으로도 첩첩산중이다. 영국중앙은행(BoE)은 올해와 내년에 기업 투자가 각 6% 가까이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여파로 런던이 누리던 ‘유럽의 금융 허브’ 지위도 위협받고 있다. 작년 11월 주식시장 시가총액으로 파리(2조8230억달러)가 런던(2조8210억달러)을 추월했다. 국민투표를 실시한 2016년만 하더라도 런던의 시가총액이 파리보다 1조5000억달러 이상 많아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살인 물가 지속, 노동력은 썰물처럼 이탈
인플레이션의 고통도 영국이 유독 크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브렉시트 부작용과 맞물려 깊은 상처를 냈다. 작년 7월 영국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0.1%로 40년 5개월 만에 최고치였다. 지난해 G7에서 처음 나타난 10%대 물가였다. 이후 영국 물가는 8월 9.9%로 소폭 낮아졌다가 9월부터 4개월 연속 다시 10%를 넘었다. 작년 12월 물가를 비교해보면 영국(10.5%)이 독일(8.6%), 미국(6.5%), 프랑스(5.9%)에 비해 두드러지게 높다.
무엇보다 식탁 물가가 공포 수준이다. 지난 12월 영국의 식음료 물가 상승률은 무려 16.8%에 달한다. 식량 자급률이 60%에 불과한 영국은 모자라는 먹을거리를 대부분 유럽 본토에서 수입한다. 그런데 브렉시트 이후 통관 절차가 부활하면서 시간이 지체되고 관세가 붙었다. 그 비용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애덤 포즌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소장은 “영국 물가가 다른 선진국보다 더 높은 이유의 80%는 브렉시트와 관련돼 있다”고 했다.
인력난도 심각하다.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휴업하는 식당과 객실을 줄이는 호텔이 등장할 정도다. 코로나 사태 당시 고국으로 돌아간 동유럽 근로자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게 결정타다. 작년 3분기 기준으로 EU 회원국에서 영국에 온 근로자는 237만1000명이었는데,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브렉시트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EU 출신 인력이 37만2000명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계산했다.
김흥종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은 “영국 농어촌에서는 수확기에 동유럽에서 온 계절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굴러갔다”며 “이제는 까다로운 체류 조건 탓에 몇 달 일하고 돌아가는 방식의 자유 이동이 막혀 경제 순환에 지장이 크다”고 했다. 영국농민연대는 일손 부족으로 수확을 포기한 농산물이 작년 한 해만 2200만파운드(약 338억원)에 달했다고 집계했다. 일할 사람이 적으니 인건비가 오르고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1인 가구에 40만원 ‘전기요금 폭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불러온 에너지난도 유럽 본토보다 심각하다. 영국이 EU 단일 에너지 시장에 들어 있던 시절에는 해저 케이블을 통해 수시로 제약 없이 전기를 수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와 개별 협상으로 전기를 끌어오느라 연간 수억파운드를 추가로 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정용 전기요금이 ‘폭탄’이 된 요인이다. 코트라(KOTRA) 런던무역관의 한 직원은 “혼자 사는데도 월 전기요금이 260파운드(약 40만원)가 나온다”고 했다. 영국 보건안전청장은 라디오에 출연해 “전기요금을 아낀다며 냉장고 전원을 끄면 음식이 상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지난 1일 영국 전역에서는 교사·공무원·철도기관사·버스기사를 비롯해 공공 부문 종사자 50만명이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주요 교통망이 마비되고 학교 수업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고물가로 실질 임금이 줄어든 가운데 노동 인구 감소로 업무량이 급증하자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파업 참가자들은 “10%대 물가에 맞게 임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경제 흐름이 악순환하기 시작하자 되돌리기 어려워졌다. 영국중앙은행(BoE)은 지난 2일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려 연 4%로 끌어올렸다. 하루 전날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0.25%포인트만 올리며 통화긴축 속도를 낮췄지만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영국은 미국보다 더 큰 폭으로 금리를 올렸다. BoE는 이달까지 무려 10번 연속 금리를 올렸다. 결국 높은 금리가 가계 이자 부담을 키우고 수요를 제약해 영국 경제가 수렁에서 탈출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브렉시트는 심각한 재정난에 불을 붙이는 결과도 가져왔다. 런던의 민간 싱크탱크 CER은 “브렉시트를 하지 않았다면 정부 세수가 연간 400억파운드(약 61조원) 더 많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재정이 빡빡해지면서 정부의 공공 서비스 지출에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 특히 병원 진료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는 불만이 가중되고 있다.
영국의 자존심인 파운드화는 계속 평가절하되고 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직전과 비교해 요즘 파운드화 가치는 17% 떨어져 있다. 작년 9월 감세안 파동 때는 환율이 파운드당 1.03달러까지 추락하기도 했다. 15년 전인 2007년 10월 파운드당 2달러가 넘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브렉시트 이후 생활고가 가중되자 불안감을 느끼는 영국인이 부쩍 늘었다. 여론조사기관 포칼다타가 브렉시트 3주년을 맞아 실시한 조사에서 전국 632개 하원 선거구 가운데 99.5%인 629곳에서 ‘영국이 EU를 떠난 결정은 잘못됐다’는 데 동의하는 응답자가 더 많았다. 여론조사기관 유고브의 작년 11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브렉시트는 옳은 결정이었다’는 데 32%만 동의해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2016년 8월 첫 조사 때는 47%였다.
◇유럽의 관문에서 유럽의 변방으로
브렉시트 찬성파들이 호언장담한 경제 선순환 원리도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이들은 EU 통제에서 벗어나 세계 각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어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FTA를 체결한 나라는 영연방 국가인 호주·뉴질랜드에 불과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바이든 행정부가 (영국보다) EU에 기울면서 영·미 FTA 협상이 지지부진하다”며 “EU는 회원국 추가 이탈을 막기 위해 영국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만들길 원한다”고 했다.
미국과 EU가 규제와 보조금을 통일하기 위해 마련한 협상 창구인 TTC(무역기술위원회)에서도 영국은 빠져 있다. 중국에 맞서 글로벌 무역 질서를 재편하는 논의에 영국이 배제돼 있다는 뜻이다. 김흥종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은 “글로벌 ‘큰손’은 유럽 전체를 보고 움직인다”며 “과거 런던으로 먼저 들어가던 유럽행 투자금이 요즘에는 파리나 암스테르담 등에 먼저 유입되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어 영국이 ‘유럽의 관문’에서 ‘유럽의 변방’으로 쪼그라들고 있다”고 말했다.
정치 리더십은 브렉시트가 야기한 경제난을 해결할 뾰족한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3분의 1 이상의 영국인이 브렉시트를 지지하고 있고, 극심한 국론 분열을 겪고 EU에서 탈퇴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아 재가입을 공론화하지 않고 있다. 제1 야당인 노동당도 차기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하더라도 EU 재가입을 논의하지 않겠다는 당론을 확정했다.
다만 영어를 쓰는 나라라는 장점이 있고, 금융 허브로서 명맥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어 수년 안에 반등할 수 있다는 낙관론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EU와 꾸준하게 관계 개선을 이뤄내고 이민 규제를 뜯어고쳐 노동력을 확보하면 영국의 향후 10년은 지난 10년보다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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