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거래에 온라인·모바일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은행 지점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세계은행 집계에 따르면, 성인 10만명당 은행 지점 수는 2016년 12.3개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가 이후 4년 내리 감소해 2020년에는 10.7개로 줄었다. 2005년과 같은 수준이다. 이런 통계는 세계 평균치이며, IT가 발달한 선진국에서는 지점 폐쇄 속도가 훨씬 빠르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전통적 지점이 감소하더라도 은행과 고객이 만나야 하는 접점은 필요하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 은행들은 지점 운영 방식에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고령층이 많거나 인구가 적은 지역에서는 저렴한 비용에 금융 서비스를 지속하기 위한 은행 간 공동 점포가 확산되는가 하면, 대형 버스·트레일러를 개조한 이동식 지점도 등장했다. 화상으로 은행 직원과 대화하는 ITM(Interactive Teller Machine)이 보급돼 ATM(현금 자동 입출금기)을 밀어내는 트렌드도 나타나고 있다.
◇‘적과 동침’하는 뱅크 허브
영국 런던 동부 템스강 하류에 가까운 소도시 로치퍼드에서는 2017년이 되자 대형 은행 지점이 남김없이 사라졌다. 주민이 1만명에 못 미치자 은행들이 비용을 절감한다며 잇따라 지점을 폐쇄한 것이다. 현금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시내에 2곳만 남았다. 하나는 수수료가 비싼 ATM이고, 다른 하나는 줄을 길게 서야 하는 우체국이었다.
로치퍼드 시민들의 원성이 커지자 2021년 대안이 나왔다. 도심에 ‘뱅크 허브’라는 장소가 만들어졌다. 우체국 지점이지만 내부에 은행 창구가 하나 마련돼 있다. 핵심 포인트는 이 창구를 은행 한 곳이 다 쓰는 게 아니라 요일별로 서로 다른 대형 은행 직원들이 돌아가며 근무한다는 점이다. 월요일 내셔널웨스트민스터, 화요일 로이드, 수요일 산탄데르, 목요일 바클레이스, 금요일 HSBC 순으로 한 명씩 창구를 맡는다.
주민들은 거래하는 은행 직원이 오는 날에 맞춰 뱅크 허브를 찾는다. BBC는 “로치퍼드에서 시범적으로 시작한 뱅크 허브는 영국에서 4곳으로 늘어났으며, 반응이 좋아 신규 개설이 확정된 곳이 9곳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독일·일본에서는 주로 지방 금융회사들이 활발하게 ‘협업 지점’을 세우고 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터신용금고와 타우누스저축은행은 일주일에 이틀씩 나눠서 영업을 맡는 공동 지점을 2018년 선보인 뒤 계속 늘리고 있다. 창구에 파란불을 켜놓으면 프랑크푸르터신용금고가 영업 중이라는 의미고, 빨간불이 들어와 있으면 타우누스저축은행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본에서도 지난해 9월 야마구치현에서 야마구치은행과 모미지은행의 공동 점포 1호점이 문을 연 것처럼 주로 지방 은행들이 연합하고 있다. 이 밖에 미국, 이탈리아 등에서도 공동 지점이 선보였다.
우리나라에도 공동 지점이 4곳 있다. 지난해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이 운영 비용을 절반씩 부담하는 ‘반반 지점’을 경기도 양주와 경북 영주에 개설했다. 하나은행과 우리은행도 경기도 용인에서 공동 지점을 운영 중이다. KB국민은행과 부산은행은 부산 북구에서 전국 단위 은행과 지방 은행의 협업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스위스에 등장한 차량 이동형 지점
국토가 광활한 미국과 산악 지대가 많은 스위스는 은행들이 버스·트럭 등을 개조한 ‘움직이는 지점’을 가동한다.
미국 코메리카(Comerica)은행은 파란색으로 칠한 대형 트럭을 개조한 이동식 지점을 2021년 9월 처음 선보였다. 은행 이름과 연동하고 움직인다는 어감을 더해 ‘고메리카(Gomerica)’라고 명명했다. 코메리카은행 직원들은 고메리카를 세워놓고 대출 상담을 한다. 허리케인·지진 등 자연재해로 지점이 폐쇄될 때도 고메리카가 출동해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
159년 역사를 가진 스위스의 BLKB은행이 트레일러를 개조해 제작한 이동식 지점에는 외부에 좌우 하나씩 높이가 서로 다른 ATM이 2개 설치돼 있다. 내부는 사무실처럼 꾸며져 있어 은행 직원과 상담이 가능하다.
차량을 활용한 이동형 지점은 광고 효과를 덤으로 누린다. 미국 센테니얼은행은 별이 여럿 그려진 은행 상징을 트럭형 지점 바깥에 크게 디자인했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센테니얼은행이 다가온다는 게 느껴진다.
미국에는 대형 차량을 은행 지점으로 개조하는 전문 업체도 있다. 인디애나주에 있는 모바일퍼실리티라는 업체는 와이파이, 에어컨, 자체 전기 발전기 등을 설치하고 내부 인테리어를 은행용으로 바꿔준다. 23피트(약 7m)에 16만달러(약 2억원)를 받는다.
◇ATM 퇴조하고 ITM 각광
물리적 지점이 필요하지 않은 인터넷 은행들은 브랜드 가치 제고에 목표를 두고 젊은 고객이나 지역 주민들을 껴안을 수 있는 공간을 선보이고 있다.
스페인 인터넷 은행인 이매진은행은 바르셀로나 중심부에 3층짜리 ‘이매진카페’를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 작업을 할 수 있다. 컴퓨터 게임방, 대형 TV가 걸린 영화방이 있다. 미술 전시회를 비롯해 갖가지 행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영국 인터넷 은행 버진머니가 설치한 ‘비워크스(B works)’라는 곳도 요가 스튜디오, 코워킹 공간, 이벤트방, 세미나룸 등을 갖춘 젊음의 장소다.
싱가포르의 OCBC은행은 MZ세대를 겨냥한 ‘프랭크’라는 금융 상품 브랜드를 키우기 위해 ‘프랭크 스토어’라는 지점을 4군데 두고 있다. 실내가 음반 가게 또는 서점을 연상시킨다. 대형 TV, 음료 자판기, ATM 등을 갖추고 있고, 한쪽 벽면에는 신용카드 상품이 쭉 소개된 코너가 있다.
오랫동안 무인 금융 서비스를 대표해온 ATM 대신 ITM을 도입하는 은행도 늘고 있다. ITM은 스크린을 통해 고객이 원격으로 은행 직원과 대화를 하며 업무를 볼 수 있는 기기다. 미국 금융 전문지 파이낸셜브랜드는 “ATM이 현금 입출금 정도에 국한된 것과 달리 ITM으로는 기존 창구 직원 업무의 95%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ITM 설치 비용이 만만치 않을뿐 아니라, 은행으로서는 ITM 상담을 위한 직원 고용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효율성이 높지 않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은행 업계에서는 직원과 대면하는 지점이 완전히 사라지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얼굴을 마주보는 서비스에 대한 신뢰도가 높고, 앱이나 화상 대화로는 하기 어려운 심도 깊은 대화가 필요한 경우도 자주 있기 때문이다.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최고경영자는 “여전히 지점을 통해 신규 계좌의 60~70%가 개설되고 있으며 자영업자들이 지점 상담을 필요로 한다”며 “대도시에 근년에 새로 연 지점에서 카드 영업이나 중소기업 대출이 호조를 보이며 좋은 실적을 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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