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전역에 팔지 못해 쌓아둔 와인이 무려 300만헥토리터(hL)에 달합니다.”
베르나르 파르주 프랑스 와인종사자협회 회장이 최근 라디오에 출연해 “와인 재고가 너무 많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300만hL(1hL=100L)는 와인 4억병 분량이다. 보르도 지역 한 해 생산량의 4분의 3에 해당한다. 파르주 회장은 “와인이 팔리지 않아 과잉 생산되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10년 후 없어지는 일자리가 15만 개에 달할 수 있다”고 했다. 프랑스 와인 업계 종사자 60만명 가운데 4분의 1이 일터를 떠나야 하는 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와인은 포도 재배부터 오크통에 담아 숙성하는 과정까지 인간과 자연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술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신의 물방울’이라는 만화가 선풍적 인기를 구가했을 정도로 문화와 예술 차원에서도 언급된다. 여전히 와인은 고급 주류라는 위상은 유지하고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어 글로벌 와인 산업이 기로에 섰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급기야 올해 프랑스 정부는 쌓아둔 와인을 공업용 알코올로 전환하는 비용으로 1억6000만유로(약 2200억원)의 재정을 투입하는 극약 처방을 쓰기로 했다. 하지만 일시적인 재고 처리용 아이디어일뿐 와인 산업의 시련을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건강 유지를 위해 알코올 섭취를 줄여가는 추세다.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로 각국의 MZ세대가 와인을 점점 멀리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근년에는 기후 변화가 포도 생산 환경의 급변을 야기하며 새로운 위협 요소가 되고 있다.
다만, 중국에서 와인을 즐기는 이들이 늘고 있어 길게 보면 반등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다. 이와 맞물려 중국이 ‘제2의 보르도’, 인도가 ‘인도판 나파밸리’를 육성하고 있어 미래에는 와인 산업의 판도가 바뀔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프랑스 와인 소비 60년 사이 70% 감소
세계인들이 와인을 점점 덜 마신다는 건 숫자로 나타난다. 프랑스 디종에 본부가 있는 국제와인기구(OIV)에 따르면, 2000년 이후 글로벌 와인 소비가 가장 많았던 해는 2억5151만hL를 소비한 2007년이다. 이후로 해마다 기후 조건 등에 따른 편차는 있지만, 장기 추세로 줄어드는 흐름이 뚜렷하다.
특히, 2018년 이후 3년 연속 소비량이 줄어들며 시간이 갈수록 감소세가 빨라지고 있다. 2020년 소비량(2억3348hL)은 최고점이었던 2007년과 비교해 7.2%나 감소한 수치다. 2021년은 다소 반등했지만 전년보다 0.5% 늘어나는 데 그쳤다.
무엇보다 전통적으로 와인을 많이 생산하고 즐겨 마셔온 유럽에서 와인을 멀리하는 풍조가 두드러진다. 1860년대 이후 10년 단위로 와인 소비 패턴을 연구한 호주 애들레이드대 와인경제연구센터에 따르면,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갈 4국에서 1인당 연평균 와인 소비량이 가장 많았던 때는 1920년대로 119.9L였다. 1950년대도 102.1L였다. 하지만 이후 빠르게 줄어들어 2010~2016년은 33.2L에 그쳤다. 2010년대 소비량은 1950년대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다. 공영방송 프랑스앵포는 “최근 60년 사이 프랑스인의 와인 소비량은 70% 감소했다”고 했다.
서유럽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1970년대와 2010년대를 비교할 때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은 1인당 연간 와인 소비량이 14.1L에서 7.7L로 감소했고, 중남미 역시 9.2L에서 3.3L로 줄었다.
주류 전문가들은 젊은이들이 와인을 점점 멀리하는 현상이 와인 산업이 당면한 가장 큰 난관이라고 말한다. 시장조사기관 칸타르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18~34세의 주류 구입 시 와인 선택 비율은 2014년에는 31%였지만 2021년에는 23%로 줄었고, 같은 기간 맥주 선택 비율은 24%에서 39%로 늘었다.
글로벌 MZ세대 와인 외면
와인 소비가 줄어드는 이유로는 세대 간 소득 양극화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MZ세대가 와인 가격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점이 우선 꼽힌다.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2021년 세계 평균으로 병·캔 등 판매 단위 하나당 가격이 와인은 12.33달러였고, 맥주는 5.15달러였다. 유럽의 대형 마트에 가면 맥주는 병·캔당 3~4유로 안팎에 살 수 있지만, 와인은 저렴한 축에 속해도 병당 10유로에 가깝다. 부르고뉴산은 50유로를 넘는 경우도 많다.
세계적으로 1인 가구가 늘어나는 것도 와인 소비를 줄이는 요소다. 전통적으로 와인 한 병은 750mL로 용량이 굳어져 있다. 혼자 집에서 한 병을 따기에는 부담스러운 양이다. 휴대도 편리하지 않다. 와인업계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다. 베르나르 파르주 프랑스 와인종사자협회 회장은 “병의 크기를 줄이는 방향으로 다양한 사이즈를 출시해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750mL짜리로 와인을 규격화해온 생산업자들은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와인냉장고를 비롯한 관련 상품도 모두 750mL에 맞춰져 있다.
젊은 세대의 식사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는 점도 와인이 식탁에 오를 가능성을 낮춘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시는 와인이 MZ세대 식문화와 상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싸고 양이 많은 와인은 MZ세대가 경쾌하게 빨리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반응이 많다. 프랑스 뉴스채널 BFM은 “와인은 중장년이나 대가족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식사에 격식을 갖춰야 한다는 인식이 옅어지는 것도 와인을 덜 찾는 이유”라고 했다. 파리에서 스타트업을 경영하는 미카엘 마스(39)씨는 본지 통화에서 “맥주가 특색 있게 점점 다양한 상품이 출시되는 반면 와인 품목은 오래전부터 고정적이라는 점도 작용한다”고 말했다.
술이 건강을 해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주류 소비 자체가 감소하는 현상도 와인 소비를 줄이는 배경이 되고 있다. 옥스퍼드대 통계 사이트 아워월드인데이터에 따르면, 1980년에는 독일인 1인당 연간 알코올 섭취량이 12.7L였지만 2014년에는 9.6L로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미국인의 알코올 섭취량은 7.7L에서 7L로 감소했다. 와인에서 화학 첨가물이 발견되고 당분 함유량이 지나치게 많다는 경고도 끊이지 않는다. 영국알코올건강연합(AHA)의 분석에 따르면, 일부 와인은 두 잔만 마셔도 성인의 하루 당분 섭취 권장량에 도달한다.
와인업계 일각에서는 미국에서 와인 시장이 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고 희망을 품는다. 미국인 1인당 연간 와인 소비량(2021년 기준 12L)이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인의 30%에 못 미치고, 영국인·스웨덴인의 절반 정도라서 확대될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MZ세대는 와인을 적극적으로 찾지 않는 편이다. 2021년 여론조사기관 해리스폴이 미국인 1949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파티에 가져갈 술을 하나 고르라’는 질문에 와인을 꼽은 비율이 65세 이상에서는 49%였지만 21~34세에서는 15%에 그쳤다.
요즘 미국 MZ세대는 ‘알코올이 들어간 탄산수’인 하드셀처라는 술에 열광한다. 하드셀처는 과일향 탄산수에 5% 안팎의 알코올을 넣고 설탕이나 탄수화물을 거의 넣지 않아 칼로리가 100kcal 정도로 낮다. 술은 마시고 싶지만 건강 유지에도 관심 많은 젊은이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2021년 미국의 하드셀처 시장은 25억달러로 2018년(4억8800만달러)과 비교해 3년 사이 5배 성장했다. 맥주가 건재하고 하드셀처가 주가를 올리는 틈을 와인이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실정이다. 미국의 와인 시장 분석가 롭 맥밀런은 뉴욕타임스에 “향후 10년간 미국 내 와인 판매가 20% 감소할 수 있다”고 했다.
기후변화·보복관세로 휘청
근년에 두드러지는 기후변화도 와인 산업에 타격을 주고 있다. 서리·가뭄·홍수·우박이 예전보다 잦아지면서 와인용 포도 재배에 애를 먹고 있다. 와인 농가들이 이상 기후에 대비하거나 수습하는 과정에 비용을 투입하게 되면서 제조 원가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처럼 유럽에 심한 가뭄이 들면 포도를 예정보다 빨리 수확해야 한다. 그러면 포도의 향미가 부족해 와인 맛이 떨어지는 문제가 생긴다. 기후 변화와 와인 소비 감소가 맞물려 포도밭이 점점 줄어드는 현상도 나타난다. OIV에 따르면, 2003년 781만ha였던 세계 와인용 포도밭 넓이가 2021년에는 729만ha로 6.7% 감소했다.
작년부터 본격화된 글로벌 인플레이션도 악재다. 와인은 만드는 과정이 길기 때문에 인건비와 전기료를 많이 투입해야 한다. 와인 병 제조비나 레이블용 종이 가격 등이 오르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의 유리병 생산 가격은 올해 1월 기준으로 2년 전과 비교해 21.6% 올랐다.
와인은 고급품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종종 통상 분쟁의 대상이 된다. 외교·안보 분쟁이 가열될 때 자주 철퇴를 맞는 품목이 와인이다. 2019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과 EU(유럽 연합) 정상들 간에 불협화음이 커진 끝에 트럼프 행정부는 EU산 와인에 최고 25%의 보복관세를 매겼다.
더 큰 보복 조치는 중국과 호주 사이에 있었다. 2021년 3월 중국은 호주산 와인에 최고 218%라는 가혹한 보복관세를 부과했다. 호주가 미국에 동조해 중국을 코로나 바이러스 진원지로 지목하고, 쿼드(미국·인도·일본·호주의 4국 안보협의체)에 동참하자 중국이 앙갚음에 나선 것이었다. 호주 와인의 최대 수출국이 중국이었기 때문에 호주 와인업계는 ‘관세 폭탄’을 얻어맞고 휘청거렸다. 호주 와인 종사자 단체 ‘와인 오스트레일리아(WA)’는 2021년 7월부터 1년간 중국으로의 와인 수출이 2억600만호주달러(약 1800억원)로 전년 대비 74% 급감했다고 밝혔다.
향후 글로벌 와인 업계는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고급품만 경쟁력을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프랑스 와인 수입 업체 코지와인의 김성중 대표는 “품질이 떨어지는 와인들은 가격이 낮다고 해도 대체로 맥주보다는 비싸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열악한 유럽 젊은이들의 선택을 받기 어렵다”며 “반면 고급 와인은 여전히 없어서 못 파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와인 시장이 점점 양극화되고 있다”고 했다.
‘중국판 보르도’ ‘인도판 나파밸리’ 등장
주류업계에서는 중국과 인도가 와인 생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어 세계 와인시장에 격변을 부를 수도 있다고 예상한다. 중국은 2020년 중북부 닝샤후이족자치구의 허란산 일대를 대규모 와인 생산지로 개발해 ‘제2의 보르도’로 키우겠다고 발표했다. 위도가 보르도와 비슷한 이 지역은 황허 물줄기가 지나고 다소 건조한 기후라 와인용 포도 재배에 적합하다. 이 일대에 최근 와이너리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어 중국의 ‘와인 굴기’를 보여준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중국 정부는 허란산 일대에서 2035년이면 6억병의 와인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2020년 프랑스 보르도 지역 와인 생산량(5억2200만병)보다 많은 양이다.
중국은 와인 소비 세계 6위 국가다. 중국인 1인당으로는 연간 와인 소비량이 0.9L다(2021년). 이는 프랑스인의 52분의 1, 미국인의 13분의 1 수준이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중산층이 두꺼워지는 중국에서 1인당 와인 소비량이 3L만 되더라도 프랑스·이탈리아를 제치고 미국에 이은 와인 소비 2위 국이 된다. 중국 정부가 허란산 일대를 와인 특구로 조성한 것도 자국 내 미래 수요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관측이 있다. 미국 경제방송 CNBC는 “중국에서 와인이 ‘국민 술’ 바이주의 아성을 넘어서려면 바이주만큼 가격이 저렴해져 대중적인 소비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올해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 인구대국이 될 인도 역시 와인 제조에 시동을 걸었다. 2000년대 들어 하나둘 와이너리가 증가해 작년 연말까지 110여 곳에 이른다. 그중 선구자 격으로 1999년 서부 나시크 지역에 설립된 ‘술라 와이너리’는 직원 1000명, 연 매출 50억루피(약 800억원)에 달한다.
요즘 나시크 지역은 ‘인도의 나파밸리’로 불리고 있다. 이곳은 기온이 5월이면 섭씨 40도까지 오를 정도로 무덥지만, 겨울에 포도를 재배하고 봄이 시작되는 시점에 수확하는 방식으로 계절을 뒤집어 양질의 와인용 포도 생산에 성공했다. BBC는 “인도 와이너리들이 캔으로 제작한 와인을 출시하거나 포도 대신 키위, 자두, 복숭아를 사용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며 “인도에서 술을 멀리해야 한다는 금기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어 와인 시장 성장 가능성이 엿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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