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에서 나란히 독립한 코카서스산맥 남쪽의 두 나라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5일(현지 시각)까지 아흐레째 교전을 벌이고 있다. 정확한 피해는 집계가 어렵지만 양측을 합쳐 군 병력만 수백 명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서방 선진국이 양측에 똑같이 휴전을 요구하는 가운데 유독 프랑스의 행보가 다르다. 분명하게 아르메니아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터키가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하고 있다”거나 “시리아의 지하디스트(무슬림 무장 세력)가 아제르바이잔군에 가담했다”며 이슬람 세력을 비난하고 있다. 프랑스가 아르메니아 편을 드는 이유는 끈끈한 양국 간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아르메니아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시발점은 12~14세기 전개된 십자군 전쟁이다. 유럽의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할 때 아르메니아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당시 아르메니아 왕들은 십자군을 도와주는 대가로 프랑스와 무역을 늘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양국 간 인적 교류가 늘어나기 시작해 아르메니아인들이 하나둘 프랑스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 17세기에 아르메니아인이 파리에서는 커피숍을, 마르세유에서는 인쇄소를 차렸다는 기록이 있다. 나폴레옹이 아끼던 보디가드 중에는 아르메니아 전사가 있었다. 19세기에는 교육을 목적으로 프랑스로 이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이주민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1차대전 직전까지 약 4000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프랑스에 살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프랑스에 아르메니아인들이 넘어온 건 1차대전 도중이었다. 당시 오스만튀르크(현 터키)에 의해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집단 학살을 당했고, 비극을 피해 수만 명이 한꺼번에 프랑스로 이주했다. 2차대전 때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에 아르메니아 출신 이주민들이 가담했다. 함께 피를 흘리며 ‘동지’로서 유대감이 굳어지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이 프랑스 사회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다.
현재 프랑스인 중 아르메니아계는 약 50만명으로 추정된다. 유럽의 아르메니아 사회 중에서 가장 크다. 아르메니아 인구가 300만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다. 음악·공연·문학 등 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이 많다. ‘샹송의 전설’로 불리는 가수 샤를 아즈나부르, 1993~1995년에 총리를 지내고 1995년 대선에 출마했던 정치인 에두아르 발라뒤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 멤버였던 유리 조르카예프 등이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