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코로나 예방 백신 접종에 속도가 붙으면서 ‘백신 여권(旅券)’ 제도 도입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백신 여권 제도란 백신을 맞은 사람들에게 인증서를 발급해주고 이들에 한해 여행, 공연 및 스포츠 행사 관람 등을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빠른 일상 복귀를 위해 백신 여권을 서둘러 도입하자는 의견과 백신을 맞지 못한 이들에게 차별이 될 수 있다며 반대하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프랑스 국제 보도 채널 프랑스24에 따르면, 아이슬란드가 지난 1월 말 ‘백신 접종 증명서’를 발급하기 시작한 이후 23일까지 유럽에서 백신 여권을 도입했거나 도입 의사를 밝힌 나라는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폴란드, 스웨덴, 체코, 덴마크 등 13국이다. 백신 여권 도입을 원하는 나라들은 남유럽에 많다. 관광산업 비중이 높아서 하루라도 빨리 관광객을 받아야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도 보리스 존슨 총리가 22일 “‘(백신) 접종 상태 증명서’를 검토할 것”이라며 백신 여권 도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민간에서는 항공업계가 백신 여권을 회생으로 가는 열쇠로 받아들이고 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올해 1분기 안으로 온라인 기반 ‘트래블 패스’를 내놓기로 했다. 스마트폰 앱 형태로 백신 접종 여부와 코로나 검사 결과를 제시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IATA는 이달 초 EU(유럽연합)에 서한을 보내 백신 여권 도입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신 여권 도입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백신 공급이 부족하고, 고령자·의료진 등에게 접종 순서가 밀린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접종을 마친 사람만 우대하는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나온다. 영국의 일부 기업들이 백신 접종자만 채용하겠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어 논란은 뜨거워지고 있다. 애나 베두스키 영국 엑서터대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백신 여권은 접종을 마친 사람의 자유만 보호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는 제약하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가 국민 개개인의 백신 접종 여부를 파악하는 ‘빅브라더’가 된다는 것이다.
논란이 가열되자 일부 국가는 백신 여권에 대해 공식적인 찬반 입장을 유보한 채 고심하고 있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이 그렇다. 로즐린 바슐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백신 여권 소지자에게 공연 관람을 허용할 의향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개인 의견을 밝히자면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프랑스인들도 지난달 여론조사기관 IFOP 조사에서 62%가 백신 여권을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해외 여행을 가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IFOP은 설명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EU는 아직 공식 입장을 정하지 않고 있다. 접종을 마친 사람이 세계 인구의 2%, 유럽 인구의 3% 안팎에 불과하기 때문에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앨리슨 톰슨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라디오에 출연해 “백신 여권 도입 여부에 대한 결정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며 “결국은 각국 의회가 (도입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