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이스탄불 시내에서 20일(현지 시각) 이스탄불 협정 탈퇴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EPA 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20일(현지 시각)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자는 국제 협약인 ‘이스탄불 협정'에서 탈퇴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스탄불 협정은 여성을 살해하거나 때린 사람을 기소해야 한다는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여성 폭력 방지를 위해 구속력을 가진 첫 번째 국제 조약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45국이 참여하고 있다. 이 협약은 2011년 이스탄불에서 터키가 맨 처음 가입 서명을 하면서 이스탄불 협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터키는 이스탄불 협정이 태동한 나라였지만, 맨 처음 탈퇴한 나라가 됐다.

여성 인권을 중시하는 국제적 흐름에 역행하며 굳이 터키가 이스탄불 협정에서 탈퇴한 이유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자신의 핵심 지지층인 이슬람 강경파의 요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이 이끄는 집권당인 정의개발당과 이슬람 보수 세력은 이스탄불 협정이 이혼을 조장해 터키의 전통적인 가정상을 훼손한다고 주장해왔다. 또한 일부 강경파는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주장도 펴왔다.

터키 전역에서는 이스탄불 협정 탈퇴를 규탄하는 여성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여성 권익 운동을 상징하는 보라색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여성들이 많았다. 여성 단체들은 “에르도안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여성의 권리를 짓밟았다”고 주장했다. 야당 소속인 에크렘 이마모울루 시장은 트위터에서 “여성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노력을 뭉개버린 행위”라고 비판했다. 터키는 여성 폭력이 심각한 수준이다. 현지 여성 단체들은 남편이나 남자 친구에 의해 살해된 터키 여성이 작년에 300명이 넘었고, 올해 들어서도 적어도 78명에 달한다고 집계했다.

유럽은 터키의 이스탄불 협정 탈퇴를 비난했다. 마리야 페치노비치 부리치 유럽평의회 사무총장은 “참담한 뉴스이며 거대한 좌절”이라고 했다. 독일 외무부는 “문화적, 종교적 전통을 내세우는 건 여성에 대한 폭력을 무시하는 핑계가 될 수 없다”고 했고, 프랑스 외무부는 “인권 존중의 측면에서 퇴보했다”는 성명을 냈다.

일각에서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탈퇴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을 뿐이므로 아직 정식으로 탈퇴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국제 협약을 탈퇴하려면 의회 비준을 거쳐야 하므로 아직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