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국제 환율시장에서 달러 대비 터키 리라화 가치가 장중 17% 폭락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지난 19일 중앙은행인 터키은행의 나치 아그발 총재를 전격 경질한 충격이 가해진 것이다. 아그발 총재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작년 11월 취임 이후 기준금리를 세 차례에 걸쳐 10.25%에서 19%로 끌어올렸고, 에르도안은 이 같은 조치가 경기 부양에 도움이 안 된다며 취임한 지 4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아그발을 쫓아냈다. 후임에는 여당인 정의개발당 의원을 임명했다. 에르도안이 임기 4년인 중앙은행 총재를 제멋대로 갈아치우자 통화 가치가 폭락하고 자본이 유출될 것이라는 공포감이 커지고 있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로이터 연합뉴스

이뿐 아니라 에르도안은 최근 들어 막무가내식 통치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20일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자는 국제협약인 이스탄불 협정에서 탈퇴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45국이 참여하고 있으며 2011년 이스탄불에서 터키가 맨 처음 가입 서명을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에르도안이 느닷없이 터키를 이 협정에서 맨 처음 탈퇴한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핵심 지지층인 이슬람 강경파가 싫어한다는 게 이유다. 터키에서는 에르도안을 규탄하는 여성들의 시위가 번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1일 “터키의 이스탄불 협약에 대한 갑작스럽고 부적절한 탈퇴는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에르도안은 또 이스탄불 협정에서 탈퇴한 20일 쿠르드 민병대가 주둔하고 있는 시리아 북부 공습 명령을 내렸다. 터키의 시리아 북부 공습은 약 17개월 만이다. 쿠르드 민병대는 서방과 함께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를 격퇴해 미국이 동맹으로 간주하는 세력이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쿠르드족이 터키 내 분리·독립을 원한다는 이유로 테러 세력으로 규정하고 쿠르드족을 자주 공격하고 있어 서방의 비난을 받고 있다. 터키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면서도 러시아와 군사적 협력을 추구해 서방과 갈등이 계속 커지고 있다.

에르도안이 좌충우돌하는 식으로 대내외 국정을 운영하는 이유는 2017년 개헌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얻은 데다, 핵심 지지층인 이슬람 강경파가 원하는 대로 모든 정책을 끌고 가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은 터키가 내각제 시절이던 2003년 총리가 됐다. 취임 초기 경제성장을 이끌어 ‘경제 총리’로 불렸다. 외국인 투자가 급증했고, 수출이 빠르게 증가했다. 동시에 그는 국민의 99%인 무슬림들이 반기도록 ‘정교 분리 원칙’을 깨고 이슬람 색채가 강한 나라를 만들었다. 공공기관에서 히잡(이슬람 여성들이 머리를 가리기 위해서 쓰는 두건)을 착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학교에서 이슬람 교육을 강화한 정책이 큰 인기를 끌었다. 어릴 적 이스탄불의 빈민가에서 사탕·생수를 팔았던 에르도안의 입지전적인 면모에도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이 많았다.

총리를 11년간 지낸 에르도안은 총리의 4선을 금지하는 헌법에 따라 2014년 대선에 출마해 내각제 체제하의 대통령이 됐다. 이후 에르도안은 2017년 개헌을 통해 철권 통치 체제를 만들었다. 터키 공화국 설립 이후 94년간 유지한 내각제를 무너뜨리고 제왕적 대통령제로 바꿨다. 대통령이 의회 해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들어 의회를 무력화했고, 고위 법관 임면권도 대통령이 갖게 돼 사법부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됐다. 입법·사법·행정부를 모두 손에 쥔 1인 체제가 되자 서방 언론은 그를 ’21세기 술탄(중세 이슬람 제국 황제)’으로 부른다. 대통령 임기도 최장 2033년까지 가능하다.

하지만 터키의 경제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어 에르도안에 대한 터키 국민들의 반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2019년 터키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의 시장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하면서 에르도안은 타격을 입었다. 그는 EU(유럽연합)에 가입하겠다고 10여 년 전부터 국민에게 약속하고 있지만 지키지 못하고 있다.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고위 대표는 “터키가 (EU 회원국인) 그리스와 충돌하는 등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유지하면서 EU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