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현지 시각) 오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공 시신이 담긴 관을 실은 초록색 랜드로버 운구 차량이 장례식장인 성조지 예배당으로 이동하고 있다. 필립공이 살아 있을 때 직접 개조한 이 운구 차량을 따라 아들 찰스 왕세자와 윌리엄 왕세손, 해리 왕손 등 직계 가족 9명이 걷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필립공의 관을 운구하는 장면/AP 연합뉴스


17일 오후 2시 45분(현지 시각) 런던 서쪽 근교 윈저성. 100세 생일을 두 달 앞두고 지난 9일 별세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공의 시신이 담긴 관이 내궁에서 나와 짙은 초록색 랜드로버 운구차에 실렸다. 군악대의 장엄한 드럼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운구 차량은 장례식장인 윈저성 내 성조지 예배당으로 이동했다. 아들 찰스 왕세자, 윌리엄 왕세손 등 직계 가족 9명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여왕은 따로 검정 벤틀리 승용차를 타고 예배당에 도착했다. 검정 코트를 입고 있었고, 마스크와 모자까지 온통 검정이었다. 유일한 장식은 왼쪽 어깨에 단 커다란 다이아몬드 브로치였다. 여왕이 할머니로부터 받은 결혼 선물로 생전의 필립공이 좋아하던 것이었다.

오후 3시가 되자 영국 전역에서 1분간 추모 묵념 시간을 가지면서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국왕의 배우자로 살았다는 기록을 남기게 된 필립공의 장례식이 시작됐다. 해병대원 8명이 예배당 안으로 운구하는 필립공의 관을 여왕은 말없이 지켜봤다. 연단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오른쪽에 혼자 앉은 여왕의 주변 자리는 모두 비어 있었다. 여왕이 코로나에 걸리지 않도록 아무도 다가가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가족은 예배당 중간에 놓인 관을 사이에 놓고 여왕의 반대쪽에 앉았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50분 내내 혼자 있는 여왕의 모습이 결혼 후 74년간 함께한 배우자를 잃은 여왕의 처지를 상징한다며 영국 언론들은 이 장면을 집중적으로 보여줬다. 일간 더타임스는 “화려한 장식이 있었지만 공허함은 충격적”이라고 했고, 미 워싱턴포스트도 “여왕이 외로워 보였다”고 했다.

장례식장에서 내내 혼자 있었던 여왕/AP 연합뉴스


이날 장례식은 필립공이 살아있을 때 직접 기획한 대로 진행됐다. 그는 여든이 넘어서면서 자신의 장례를 준비했다. 랜드로버 운구 차량은 2003년부터 16년에 걸쳐 개조됐는데, 디자인과 도색이 필립공의 뜻대로 이뤄졌다. 운구 차량이 이동하는 동안 군악대가 연주한 노래들도 그가 선곡해둔 것이었다. 성조지 예배당 제단에는 9개의 벨벳 쿠션 위로 필립공이 받았던 훈장들이 쭉 놓였는데, 이것 역시 그의 뜻대로 연출된 것이다.

관을 덮은 천에는 필립공의 혈통인 그리스·덴마크 왕가와 그의 성(姓)인 마운트배튼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졌다. 그는 자녀들이 마운트배튼 성을 쓰기를 원했지만 여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관 위에는 꽃다발과 함께 칼 한 자루와 해군 모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2차대전 당시 해군 장교로 참전했다는 자부심이 컸다. 관이 예배당 안으로 운구될 때 군악대가 백파이프로 연주한 음악이 해군 장교가 전함에 오를 때 수병들이 부르는 노래 ‘더 사이드(The Side)’였다. 생전의 필립공은 “내가 워낙 오래 살아서 장례식을 함께 준비한 사람들이 먼저 저세상으로 갔다”고 말하곤 했다.

필립공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그는 조촐하게 치르겠다며 800명의 참석자를 염두에 뒀다. 2002년 여왕의 어머니 장례식에 2000명이 참석했던 것과 비교하면 ‘미니 장례식’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 방역 규정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가족 30명밖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윈저성 바깥으로 취재진과 추모객들이 몰려들어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필립공은 성조지 예배당 지하 묘소에 묻혔다. 여왕의 부모 곁이다. 나중에 여왕이 별세하면 필립공의 유해를 옮겨 부부는 함께 윈저성의 다른 예배당인 조지 6세 기념관 지하에 묻히게 된다.

장례식을 계기로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손 형제가 화해할지도 관심이었다. 장례식 내내 떨어져 있던 형제는 끝나고 돌아갈 때 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목격됐다. 윌리엄의 아내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이 형제가 이야기를 나누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영국 언론은 미들턴을 ‘피스 메이커(peace maker)’라고 표현했다. 왕실이 인종차별을 했다고 폭로한 해리의 아내 메건 마클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자택에서 TV 중계로 장례식을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