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가장 힘들고 외로웠던 여정’을 함께한 한 명의 여성, 그는 누구인가.”
지난 17일 오후(현지 시각)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남편 필립공의 장례식이 열린 윈저성. 아들 찰스 왕세자 등 직계 가족 9명은 필립공의 관을 싣고 장례식장인 성조지 예배당으로 향하는 운구차 뒤를 따라 걸었다. 여왕은 별도로 벤틀리 승용차를 타고 예배당에 도착했다. 이때 승용차 안 여왕의 옆자리에 노년의 한 품위 있는 여성이 앉아 있었다. 여왕이 가족만큼, 어쩌면 가족보다 더 의지하는 사람일 수도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영국 언론들은 이 여성을 집중 조명했다.
이 여성은 87세의 수전 허시로 밝혀졌다. 1960년 왕실 직원으로 채용돼 여왕에게 답지하는 수많은 편지에 답장하는 업무를 맡으며 여왕을 보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61년간이나 여왕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왕실 직원 중에서도 입이 무겁고 충성심이 두드러져 여왕의 신임을 얻었다. 여왕의 손자인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손의 보모를 정할 때 수전이 추천한 인물이 낙점된 것으로 전해졌다.
수전은 윌리엄 왕세손의 여섯 대모(代母)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는 왕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장 잘 꿰고 있는 인물로 통한다. 고(故) 다이애나 왕세자빈과 메건 마클 왕손 부인이 처음 왕실 생활에 적응할 때 안내하고 도움을 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수전은 노년의 여왕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최측근이다. 여왕 보좌진 중에서도 대장이라는 뜻에서 별명이 ‘넘버 원 헤드 걸(No. 1 head girl)’이다. 코로나 사태 직전까지 여왕이 해외 일정을 소화할 때도 따라다녔다.
여왕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이뤄지는 세심한 보좌를 그가 맡는다. 대중이 지켜보는 행사에서 여왕이 물건을 구입할 때 현금을 얼른 여왕의 손에 쥐여주거나, 여왕이 누군가에게 선사하는 꽃다발을 마지막으로 건네주는 역할이 수전의 몫이다. 일간 텔레그래프는 “공식 행사에서 수전이 여왕과 자주 같이 사진이 찍혔지만 워낙 그림자처럼 수행하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았다”고 했다.
수전은 아직도 61년 전 처음 왕실 직원이 됐을 때처럼 여왕에게 온 편지에 답장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보수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여왕 부부는 지난해 코로나 사태가 터진 이후 런던을 떠나 교외의 윈저성에서 머물러왔는데, 봉쇄 기간에 함께 지낸 직원 20명 사이에서도 수전이 팀장 역할을 했다.
영국 언론들은 여왕이 남편을 마지막으로 배웅하는 길에 동행할 사람으로 일찌감치 수전을 점찍고 함께 가줄 것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수전은 이날 여왕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대비하려고 장례식이 열리는 동안 성조지 예배당 바로 옆에서 대기했다.
수전도 명문가 출신이다. 아버지가 백작 작위를 갖고 있는 귀족이었다. 남동생 윌리엄 월드그레이브는 1990년대 보수당 정부에서 농어업식품부 장관과 보건부 장관을 지냈다. 수전의 사별한 남편 마마듀크 허시(1923~2006)는 1986년부터 10년간 공영방송 BBC 회장을 지냈다. 역대 최장수 BBC 회장이란 기록을 아직도 갖고 있다. 마마듀크는 2차 대전 당시 다친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지팡이에 의지했지만 언론계에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95년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남편 찰스 왕세자의 외도를 폭로한 BBC 인터뷰가 나온 당시에도 마마듀크는 BBC 회장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제작 내용을 미리 상부에 보고하지 않는 BBC 전통 때문에 마마듀크는 다이애나의 인터뷰를 미리 알지 못했고, 그에 따라 수전이 여왕에게 사전에 귀띔할 기회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