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동부 펠릭스토 항구에는 요즘 처리하지 못한 컨테이너가 5만개 이상 쌓여 있다. 영국 수출입 컨테이너 물동량의 약 40%를 책임지는 이 항구는 연간 400만개, 하루 평균 1만개 이상의 컨테이너를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대형 트럭 운전기사 부족으로 컨테이너 운송이 멈춘 탓에 항구 곳곳에 컨테이너가 대책 없이 쌓이고 있는 것이다. 영국 언론들은 “이런 상태가 열흘 넘게 계속되고 있다”는 항구 담당자의 말을 전했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화물 주인들은 우회로를 찾아 나서고 있다. 세계 최대 선사인 덴마크의 머스크는 펠릭스토항으로 향하던 대형 컨테이너선을 네덜란드 로테르담항으로 보내 컨테이너를 하역한 뒤 작은 선박에 다시 실어 영국의 다른 항구로 실어나르고 있다. 그러는 사이 영국에서는 필수품과 연말 선물 등을 미리 사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크게 번지고 있다.
대서양 건너 미국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미 전체 수입품의 4분의 1이 들어오는 LA항과 비치항은 최근 평일에도 몇 시간씩 문을 닫는다. 지난봄부터 팬데믹을 극복한 미국 경제가 살아나며 수입품 소비 수요는 폭발하는데, 해운·하역·창고·운송·소매업체 관련 근로자들은 아직 팬데믹 이전 수준까지 현장에 복귀하지 않은 탓이다. 이로 인해 대형 컨테이너선들이 하역을 못 해 평균 11일씩 바다에서 대기하고, 컨테이너 터미널에도 운송을 기다리는 화물이 산처럼 쌓이는 ‘컨테이너겟돈(컨테이너와 인류 최후의 전쟁이란 뜻의 아마겟돈을 합친 신조어)’ 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미국 동부 뉴욕항, 남부 조지아주 서배너항에서도 같은 장면들이 벌어지고 있다.
연말을 앞두고 대형 쇼핑 시즌이 다가오면서 전 세계 물류 대란이 더욱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중국 칭다오에서 영국 펠릭스토로 컨테이너 한 개를 보낼 경우 비용은 작년 2500달러에서 최근 1만5000달러로 6배 수준이 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에서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13일(현지 시각) 물류 정체가 빚어지고 있는 서부 LA항과 롱비치항 운영사, 트럭 노조, 미 주요 물류·운송 기업들과 관계 부처 등을 모아 화상회의를 열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바이든은 “(크리스마스 등) 연말 휴일들이 다가오는 가운데 국민들이 사려는 선물이 제때 도착할지 궁금해하는 것을 잘 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향후 90일간 서부 항만을 24시간 운영 체제로 가동한다”는 내용의 특별 대책을 발표했다. 롱비치항이 3주 전부터 부분적 24시간 운영에 들어갔는데, LA항도 같은 비상 체제로 운영하겠다고 했다. 백악관 당국자는 이를 “90일간의 전력 질주”로 표현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물류 대란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미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9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5.4% 올랐다. 2008년 8월 이후 13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여기에 글로벌 에너지 상승이 맞물리면서 세계 경제에 대한 전망은 어두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CNN 인터뷰에서 “(미국 유가 기준이 되는)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WTI)가 (배럴당) 100달러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이날 WTI의 배럴당 가격은 81달러였다.
중국도 9월 생산자 물가가 1년 전보다 10.7% 상승했다고 중국 국가통계국이 14일 발표했다. 1996년 이후 25년 만에 가장 높은 것으로 당초 전망치를 웃도는 수치다. 최근 석탄, 석유 등을 중심으로 한 원자재 가격이 급등했기 때문이다.
핼러윈과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 연말 대목을 앞둔 미 유통·물류 업체와 소비 업계는 긴급 대책 마련에 나섰다. 미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는 항만에서 전국의 점포까지 주 7일 24시간씩 상품을 나르기로 했다. 최대 운송 업체인 페덱스와 UPS도 야간 운송을 대폭 늘리기로 했다. 월마트⋅코스트코 등 미 대형 유통 업체들은 자체 컨테이너선을 빌려 연말 쇼핑 재고 확보에 나서고 있다.
문제는 이런 물류 대란이 가까운 시일 내에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번 물류 위기가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영국의 경우, 물류 대란을 초래한 대형 트럭 운전기사 품귀 현상이 단기간에 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 언론에 따르면 당장 부족한 트럭 운전기사가 1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세계적 공급 병목과 인플레로 인해, 3분기 세계 경제가 대폭 둔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시장조사 기관 IHS마킷은 미 소비 지출의 급감을 들어 3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1.4%로 낮췄다. 국제통화기금(IMF)도 미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 7.0%에서 6.0%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